주요자료

HOME > 주요자료

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始祖公碧珍將軍事實記). 1865年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덕명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5-04-01 15:01

본문

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始祖公碧珍將軍事實記).

고려(高麗)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 이공(李公)의 휘(諱)는 총언(忩言)이니 곧 우리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다. 세계(世系)가 아득하고 멀어서 그 상세(詳細)한 것은 고증(考證)할 수 없으나 오히려 국사(國史)에 나타난 것은 가(可)히 징험(徵驗)되어 믿을 수 있다.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왕순식부전(王順式附傳)에 이르기를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忩言)이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碧珍)고을을 보전(保全)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忩言)이 성(城)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百姓)들이 그 덕(德)을 입어 평안(平安)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하자고 효유(曉諭)하니 총언(忩言)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태조(太祖)를 좇아 정토(征討)케 하였다. 영(永)의 그때 나이 18세(十八歲)였다. 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하고 총언(忩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임명(任命)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 229호(二百二十九戶)를 더 주고 또 충주(忠州) 원주(原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二千二百石)과 소금 1,785석(一千七百八十五石)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親書)를 보내어 금석(金石)같은 신표(信標)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變)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忩言)이 이에 감격(感激)하여 군정(軍丁)을 단결(團結)시키고 군량(軍糧)을 저축(貯蓄)하여 고성(孤城)으로써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가 반드시 쟁취(爭取)하려는 지역(地域)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屹然)히 동남(東南)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태조(太祖) 22년(二十二年) 무술(戊戌,938) 7월 임자일(壬子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81세(八十一歲)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家乘)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大義)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함에 이총언(李忩言)에게 명(命)하여 벽진(碧珍) 옛 터를 진호(鎭護)케 하고 이웃 고을 민세(民稅)로써 식록(食祿)케 하여 백자천손(百子千孫)까지 종시일절(終始一節)의 맹서(盟誓)를 맺어 신하(臣下)의 예(禮)로써 대우(待遇)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할 때에 이총언(李忩言)이 벽진태수(碧珍太守)로서 오직 의연(毅然)히 항복(降伏)하지 아니하고 동남(東南)의 명성(名聲)과 위세(威勢)로 서로 의지(依支)하여 안연(晏然)하였다. 태조(太祖)가 도멸(屠滅)코자 하였으나 총언(忩言)과는 예부터 친(親)한 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忩言)도 또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왕씨(王氏)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태조(太祖)에게 귀의(歸依)케 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여 총언(忩言)을 봉(封)해서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삼고 혼인(婚姻)을 맺어 대려(帶礪)의 맹서(盟誓)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아! 공(公)은 신라 말(新羅末) 도탄(塗炭)의 때를 만나 고성(孤城)을 지키고 백성(百姓)을 어루만져 덕망(德望)과 위의(威儀)가 진실로 드러났으며 한 나라가 거듭 수복(率服)될 즈음에 새 임금을 만나 대업(大業)을 도와서 풍성(豊盛)한 공훈(功勳)과 위대(偉大)한 충렬(忠烈)이 태상(太常)⑬에 기록(記錄)되고 역사(歷史)에 실렸으니 어찌 그리 훌륭하였으리오! 그러나 이미 사업(事業)이 밖으로 드러남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덕행(德行)이 안으로 온축(蘊蓄)⑭됨이 있으련만 도리어 문헌(文獻)의 징거(徵據)가 없어 능(能)히 상세(詳細)한 설명(說明)을 못하니 슬프고 애석(哀惜)하도다. 일찍이 듣건대 군자(君子)가 도통(道統)을 전(傳)하면 후인(後人)들이 가(可)히 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도학(道學)으로써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교조(敎詔)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결(契)이 오륜(五倫)을 가르친 데에서 나왔고 맹자(孟子)가 백무농상(百畝農桑)으로써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권(勸)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직(稷)이 백곡(百穀)을 뿌린 데에서 나온 것이니 크고 작음과 미미하고 드러남이 비록 같지 않으나 단서(端緖)의 출처(出處)는 가(可)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공(公) 후손(後孫)의 명성(名聲)과 덕행(德行)의 실상(實相)을 조차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찾아보면 거의 공(公)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로다.
 
공(公)의 후손(後孫)이 번성(蕃盛)해서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고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의 명현(名賢)과 거공(鉅公)이 우뚝하게 나타났으니 이를테면 대제학(大提學) 견간(堅幹), 문정공(文靖公) 극송(克松), 도원수(都元帥) 희경(希慶), 전서(典書) 존인(存仁), 정간공(靖簡公) 맹전(孟專)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 판서(判書) 승원(承元), 성산군(星山君) 식(軾), 대사성(大司成) 철균(鐵均), 좌찬성(左贊成) 승언(承彦), 정도공(貞度公) 장곤(長坤), 승지(承旨) 언영(彦英), 참의(叅議) 석경(碩慶), 세마(洗馬) 후경(厚慶), 세마(洗馬) 흘(屹),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 감사(監司) 상일(尙逸), 현령(縣令) 세옥(世玉), 효헌공(孝獻公) 세환(世瑍), 봉조하(奉朝賀) 세근(世瑾) 등(等)이 혹(或)은 문장(文章)이나 학행(學行)으로 드러났고 혹(或)은 청백(淸白)이나 절의(節義) 또는 사업(事業)으로 명망(名望)이 당시(當時)에 나타나서 성문(聲聞)이 후세(後世)까지 널리 전(傳)해졌으며 그 밖에도 명현(名賢)과 석학(碩學)이 또한 많이 빛났으니 어찌 그 근본(根本)이 없고서야 그러했겠는가?
또 가만히 듣건대 “산화공(山花公)의 증손(曾孫) 희길(希吉)이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운남(雲南)에 살았는데 그 후손(後孫)으로 이성량(李成樑)이 있어 아들인 제독(提督) 여송(如松)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救)할 때에 본국(本國)이라고 일컬으면서 심력(心力)을 다해 힘쓴 뜻은 대개 의의(意義)가 있었다.”고 이르기도 한다.
 
벽진(碧珍)은 지금 경상우도(慶尙右道) 성주목(星州牧)이니 시조공(始祖公)께서 일어나신 땅으로서 자손(子孫)들이 이로 인(因)해서 관향(貫鄕)을 삼았다. 치소(治所)서(西)쪽 15리(十五里)의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은 곧 공(公)의 유허(遺墟)이고 그 좌강(左岡) 수백보(數百步)는 곧 공(公)의 묘소(墓所)였으나
임진병난(壬辰兵亂) 이후로는 그 장소를 정확히 알수가없어서, 일찌기 우암 송문정공의 말씀에 따라,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하게 되었다.


고종 원년(高宗元年) 갑자(甲子,1864)에 후손(後孫)들이 보첩(譜牒) 간행(刊行)을 위(爲)하여 유허(遺墟)에서 모였는데 세월(歲月)이 오래되면 민멸(泯滅)될까 크게 두려워해서 비(碑)를 다듬어 비문(碑文)을 쓰고자 하면서 나에게 의론(議論)하거늘 내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始祖公)의 후덕(厚德)과 풍공(豊功)은 진실로 만자손(萬子孫)의 근본(根本)이 되고 토구(菟裘)의 땅과 하구(瑕丘)의 집에 이르러서는 또한 능(能)히 수백천년(數百千年)까지 보수(保守)하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盛大)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조선(祖先)의 유덕(遺德)을 소술(紹述)하는 것은 근본(根本)이요 조선(祖先)의 구기(舊基)를 수호(守護)하는 것은 말단(末端)이니 우리 백세지친(百世之親)이 되는 이는 진실로 그 말단(末端)을 소홀히 하는 것도 옳지 아니하거니와 더욱 그 근본(根本)에 힘써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구불변(永久不變)의 도리(道理)가 되는 것이니 조선(祖先)의 영혼(靈魂) 또한 반드시 오르내리면서 나도 후손(後孫)이 있다 하리라.”고 하였다.
내 어리석으나 삼가 순서(順序)에 따라 이 사적을 기록(記錄)하였으니 당세(當世)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뵈옵고 기리는 글을 청(請)하도록 하여라.
고종(高宗) 을축(乙丑,1865) 9월 11일 후손(後孫) 항로(恒老) 근서(謹書)


출처: 직장공파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조공 27세손 문경공 화서 이항노(文敬公 華西 李恒老)1792년(정조 16) ~ 1868년(고종 5)

조선 말기의 성리학자.
이칭,별칭:  자 이술(而述), 호 화서(華西), 시호 문경(文敬)
출신지 :   경기도 양평
본관 :    벽진(碧珍: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
저서(작품):   화서집(華西集), 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화서아언(華西雅言)
대표관직(경력):  공조참판, 경연관
조선후기 『화서집』, 『화동사합편강목』 등을 저술한 유학자.
 

아버지는 이회장(李晦章)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이의집(李義集)의 딸이다.
3세 때 『천자문』을 떼고, 6세 때 『십구사략(十九史略)』을 읽고 「천황지황변(天皇地皇辨)」을 지었다. 

12세 때 신기령(辛耆寧)에게서 『서전(書傳)』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반시(泮試: 한성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로 자기 자식과의 친근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과장의 출입마저 수치스럽다 하여 끝내 과거에 응하지 않았다. 

과거를 포기한 뒤 당시 학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서울의 임로(任魯)와 지평의 이우신(李友信) 등을 찾아가 학우의 관계를 맺었다.
25∼26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학문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이항로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나, 세속을 피해 쌍계사·고달사 등 사찰을 옮겨 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朱子大全)』 등 성리학연구에 힘을 쏟았다.


이항로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1840년(헌종 6) 휘경원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으며, 그 뒤에도 지방수령 등에 제수되었지만 고사하고 향리에서 강학을 위해 여숙강규(閭塾講規)를 수정하여 실시하였다. 이 무렵 한말의 위정척사론자로 유명한 최익현(崔益鉉)·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 등이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에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64년(고종 1) 당시 권력자 조두순(趙斗淳)의 천거로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에 임명된 후 같은 해에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사헌부 지평(持平)·장령(掌令) 등에 차례로 임명되었으나 노환(老患)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자격으로 입궐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주전론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으로 승진되고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으나, 대원군의 비정(秕政)을 비판한 병인상소와 만동묘(萬東廟)재건 상소 등으로 인해 대원군으로부터 배척당했다.

이항로의 학문은 주리철학(主理哲學)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호남의 기정진(奇正鎭), 영남의 이진상(李震相)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을 재건한 조선조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의 한 사람이다.
이항로의 주리철학은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을 주장한 명(明)의 나흠순(羅欽順) 일파의 우주론을 반대하고, 이(理)와 기(氣)를 엄격히 구별하는 동시에 그것을 차등적으로 인식하였다. 즉, ‘이’가 주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면 만사가 잘 다스려져 천하가 편안할 것이나, 만일 반대로 기가 주가 되고 이가 버금이 되면 만사가 어지러워져 천하가 위태로울 것이라 하여 이·기를 차등적으로 보았다.
또, 주리론에 기초를 둔 심전설(心專說), 즉 심즉리(心卽理), 심즉기(心卽氣)설을 반대하고 심합이기설(心合理氣說)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존기비(理尊氣卑)를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중교가 비판하였듯이 이리단심(以理斷心)의 이론이라 할 수 있으니 이항로의 심설은 심전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항로의 사상은 심전주리론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항로의 심전주리론은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라는 윤리와 아울러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처럼 한다는 애국사상과 자주의식을 강조함으로써 조선조 말기의 민족사상인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가 되고, 나아가서 민족운동의 실천적 지도이념으로 승화되었다.
저서로는 『화서집』·『화동사합편강목(華東史合編綱目)』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 『화서아언(華西雅言)』 12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참고문헌
『화서집(華西集)』
『면암집(勉庵集)』
『한말의 민족사상』(홍순창, 탐구당, 1975)
『한국철학사』(유명종, 한명문화사, 1963)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조선유교연원』(장지연, 해동서관, 1922)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홍순창,『독서신문』270, 1976)
「이항로」(신석호,『조선의 유학자 8인』, 신구문화사, 1974)


文化委員長  儒珍 善東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