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목 건치 연혁

HOME > 성주목 건치 연혁

 

p003.png 성주목 건치 연혁(星州牧建置沿革)

 

벽진(碧珍)은 곧 신라(新羅) 때는 성산(星山)이요 고려(高麗) 때는 경산(京山)이며 지금(只今)의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星州)의 고호(古號)이다. 신라(新羅) 때에 6가야국(六伽倻國)이 있었는데 벽진(碧珍)이 그 하나로서 국호(國號)를 혹(或)은 성산가야(星山伽倻) 혹(或)은 벽진가야(碧珍伽倻)라 하였으나 대개 한 나라인데 두 가지 이름이다(출전(出典)은 여지승람(與地勝覽)

 

성주목(星州牧)은 본래(本來) 신라(新羅)의 본피현(本彼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쳐서 성산군(星山郡)에 붙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改稱)하였으며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경산부(京山府)로 개칭(改稱)하였고 경종(景宗) 때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降等)하였다가 성종(成宗) 때에 대주(岱州)로 고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단련사(團練使)를 폐지(廢止)하고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등(陞等)하였다가 뒤에 성주(星州)로 고쳐 목(牧)으로 하였고 충선왕(忠宣王) 때 강등(降等)하여 경산부(京山府)로 하였는데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두었다가 태종조(太宗朝)에 어태(御胎)를 부(府)의 조곡산(祖谷山)에 안치(安置)하였으므로 승등(陞等)하여 목(牧)으로 하였다.

 

벽진(碧珍)은 성주읍(星州邑)에서 서(西)쪽으로 15리(十五里) 거리(距離)에 있는데 세상(世上)에서 전(傳)해오는 명암수촌(明巖樹村)이 곧 그곳이다.속언(俗言)에 전(傳)하기를 영봉산(迎鳳山) 아래가 벽진국(碧珍國)의 고도(古都)라 한다.

 

p003.png 성주목 건치 연혁(星州牧建置沿革)

 

벽진(碧珍)은 곧 신라(新羅) 때는 성산(星山)이요 고려(高麗) 때는 경산(京山)이며 지금(只今)의 경상북도(慶尙北道) 성주(星州)의 고호(古號)이다. 신라(新羅) 때에 6가야국(六伽倻國)이 있었는데 벽진(碧珍)이 그 하나로서 국호(國號)를 혹(或)은 성산가야(星山伽倻) 혹(或)은 벽진가야(碧珍伽倻)라 하였으나 대개 한 나라인데 두 가지 이름이다(출전(出典)은 여지승람(與地勝覽)

 

성주목(星州牧)은 본래(本來) 신라(新羅)의 본피현(本彼縣)인데 경덕왕(景德王) 때 신안현(新安縣)으로 고쳐서 성산군(星山郡)에 붙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改稱)하였으며 고려태조(高麗太祖) 때에 경산부(京山府)로 개칭(改稱)하였고 경종(景宗) 때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降等)하였다가 성종(成宗) 때에 대주(岱州)로 고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단련사(團練使)를 폐지(廢止)하고 다시 경산부(京山府)로 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등(陞等)하였다가 뒤에 성주(星州)로 고쳐 목(牧)으로 하였고 충선왕(忠宣王) 때 강등(降等)하여 경산부(京山府)로 하였는데 조선조(朝鮮朝)에서도 그대로 두었다가 태종조(太宗朝)에 어태(御胎)를 부(府)의 조곡산(祖谷山)에 안치(安置)하였으므로 승등(陞等)하여 목(牧)으로 하였다.

 

벽진(碧珍)은 성주읍(星州邑)에서 서(西)쪽으로 15리(十五里) 거리(距離)에 있는데 세상(世上)에서 전(傳)해오는 명암수촌(明巖樹村)이 곧 그곳이다.속언(俗言)에 전(傳)하기를 영봉산(迎鳳山) 아래가 벽진국(碧珍國)의 고도(古都)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