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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03.png 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始祖公碧珍將軍事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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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 이공(李公)의 휘(諱)는 총언(忩言)이니 곧 우리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다. 세계(世系)가 아득하고 멀어서 그 상세(詳細)한 것은 고증(考證)할 수 없으나 오히려 국사(國史)에 나타난 것은 가(可)히 징험(徵驗)되어 믿을 수 있다.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왕순식부전(王順式附傳)에 이르기를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忩言)이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碧珍)고을을 보전(保全)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忩言)이 성(城)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百姓)들이 그 덕(德)을 입어 평안(平安)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하자고 효유(曉諭)하니 총언(忩言)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태조(太祖)를 좇아 정토(征討)케 하였다. 영(永)의 그때 나이 18세(十八歲)였다. 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하고 총언(忩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임명(任命)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 229호(二百二十九戶)를 더 주고 또 충주(忠州) 원주(原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二千二百石)과 소금 1,785석(一千七百八十五石)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親書)를 보내어 금석(金石)같은 신표(信標)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變)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忩言)이 이에 감격(感激)하여 군정(軍丁)을 단결(團結)시키고 군량(軍糧)을 저축(貯蓄)하여 고성(孤城)으로써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가 반드시 쟁취(爭取)하려는 지역(地域)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屹然)히 동남(東南)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태조(太祖) 22년(二十二年) 무술(戊戌,938) 7월 임자일(壬子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81세(八十一歲)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家乘)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大義)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함에 이총언(李忩言)에게 명(命)하여 벽진(碧珍) 옛 터를 진호(鎭護)케 하고 이웃 고을 민세(民稅)로써 식록(食祿)케 하여 백자천손(百子千孫)까지 종시일절(終始一節)의 맹서(盟誓)를 맺어 신하(臣下)의 예(禮)로써 대우(待遇)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할 때에 이총언(李忩言)이 벽진태수(碧珍太守)로서 오직 의연(毅然)히 항복(降伏)하지 아니하고 동남(東南)의 명성(名聲)과 위세(威勢)로 서로 의지(依支)하여 안연(晏然)하였다. 태조(太祖)가 도멸(屠滅)코자 하였으나 총언(忩言)과는 예부터 친(親)한 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忩言)도 또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왕씨(王氏)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태조(太祖)에게 귀의(歸依)케 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여 총언(忩言)을 봉(封)해서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삼고 혼인(婚姻)을 맺어 대려(帶礪)의 맹서(盟誓)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아! 공(公)은 신라 말(新羅末) 도탄(塗炭)의 때를 만나 고성(孤城)을 지키고 백성(百姓)을 어루만져 덕망(德望)과 위의(威儀)가 진실로 드러났으며 한 나라가 거듭 수복(率服)될 즈음에 새 임금을 만나 대업(大業)을 도와서 풍성(豊盛)한 공훈(功勳)과 위대(偉大)한 충렬(忠烈)이 태상(太常)에 기록(記錄)되고 역사(歷史)에 실렸으니 어찌 그리 훌륭하였으리오! 그러나 이미 사업(事業)이 밖으로 드러남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덕행(德行)이 안으로 온축(蘊蓄)됨이 있으련만 도리어 문헌(文獻)의 징거(徵據)가 없어 능(能)히 상세(詳細)한 설명(說明)을 못하니 슬프고 애석(哀惜)하도다. 일찍이 듣건대 군자(君子)가 도통(道統)을 전(傳)하면 후인(後人)들이 가(可)히 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도학(道學)으로써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교조(敎詔)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결(契)이 오륜(五倫)을 가르친 데에서 나왔고 맹자(孟子)가 백무농상(百畝農桑)으로써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권(勸)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직(稷)이 백곡(百穀)을 뿌린 데에서 나온 것이니 크고 작음과 미미하고 드러남이 비록 같지 않으나 단서(端緖)의 출처(出處)는 가(可)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공(公) 후손(後孫)의 명성(名聲)과 덕행(德行)의 실상(實相)을 좇아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찾아보면 거의 공(公)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로다.

 

공(公)의 후손(後孫)이 번성(蕃盛)해서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고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의 명현(名賢)과 거공(鉅公)이 우뚝하게 나타났으니 이를테면 대제학(大提學) 견간(堅幹), 문정공(文靖公) 극송(克松), 도원수(都元帥) 희경(希慶), 전서(典書) 존인(存仁), 정간공(靖簡公) 맹전(孟專)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 판서(判書) 승원(承元), 성산군(星山君) 식(軾), 대사성(大司成) 철균(鐵均), 좌찬성(左贊成) 승언(承彦), 정도공(貞度公) 장곤(長坤), 승지(承旨) 언영(彦英), 참의(叅議) 석경(碩慶), 세마(洗馬) 후경(厚慶), 세마(洗馬) 흘(屹),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 감사(監司) 상일(尙逸), 현령(縣令) 세옥(世玉), 효헌공(孝獻公) 세환(世瑍), 봉조하(奉朝賀) 세근(世瑾) 등(等)이 혹(或)은 문장(文章)이나 학행(學行)으로 드러났고 혹(或)은 청백(淸白)이나 절의(節義) 또는 사업(事業)으로 명망(名望)이 당시(當時)에 나타나서 성문(聲聞)이 후세(後世)까지 널리 전(傳)해졌으며 그 밖에도 명현(名賢)과 석학(碩學)이 또한 많이 빛났으니 어찌 그 근본(根本)이 없고서야 그러했겠는가?

또 가만히 듣건대 “산화공(山花公)의 증손(曾孫) 희길(希吉)이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운남(雲南)에 살았는데 그 후손(後孫)으로 이성량(李成樑)이 있어 아들인 제독(提督) 여송(如松)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救)할 때에 본국(本國)이라고 일컬으면서 심력(心力)을 다해 힘쓴 뜻은 대개 의의(意義)가 있었다.”고 이르기도 한다.

 

벽진(碧珍)은 지금 경상우도(慶尙右道) 성주목(星州牧)이니 시조공(始祖公)께서 일어나신 땅으로서 자손(子孫)들이 이로 인(因)해서 관향(貫鄕)을 삼았다. 치소(治所) 서(西)쪽 15리(十五里)의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은 곧 공(公)의 유허(遺墟)이고 그 좌강(左岡) 수백보(數百步)는 곧 공(公)의 묘소(墓所)였으나 임진병란(壬辰兵亂) 이후(以後)로는 그 장소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일찍이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하게 되었다.

 

고종 원년(高宗元年) 갑자(甲子,1864)에 후손(後孫)들이 보첩(譜牒) 간행(刊行)을 위(爲)하여 유허(遺墟)에서 모였는데 세월(歲月)이 오래되면 민멸(泯滅)될까 크게 두려워해서 비(碑)를 다듬어 비문(碑文)을 쓰고자 하면서 나에게 의론(議論)하거늘 내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始祖公)의 후덕(厚德)과 풍공(豊功)은 진실로 만자손(萬子孫)의 근본(根本)이 되고 토구(菟裘)의 땅과 하구(瑕丘)의 집에 이르러서는 또한 능(能)히 수백천년(數百千年)까지 보수(保守)하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盛大)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조선(祖先)의 유덕(遺德)을 소술(紹述)하는 것은 근본(根本)이요 조선(祖先)의 구기(舊基)를 수호(守護)하는 것은 말단(末端)이니 우리 백세지친(百世之親)이 되는 이는 진실로 그 말단(末端)을 소홀히 하는 것도 옳지 아니하거니와 더욱 그 근본(根本)에 힘써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구불변(永久不變)의 도리(道理)가 되는 것이니 조선(祖先)의 영혼(靈魂) 또한 반드시 오르내리면서 나도 후손(後孫)이 있다 하리라.”고 하였다.

내 어리석으나 삼가 순서(順序)에 따라 이 사적을 기록(記錄)하였으니 당세(當世)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뵈옵고 기리는 글을 청(請)하도록 하여라.

고종(高宗) 을축(乙丑,1865) 9월 11일 후손(後孫) 항로(恒老) 근서(謹書)

 

    【주해(註解)】

①  징험(徵驗):앞서 보인 징조가 들어맞음.

②  효유(曉諭):타이름, 깨우쳐 줌.

③  신표(信標):뒷날에 보고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서로 나누어 갖는 표.

④  흘연(屹然):홀로 서서 굴하지 아니하는 모양. 즉 의연(毅然)히 지조가 굳고 엄한 모양.

⑤  가승(家乘):한 집안의 역사, 집안의 계보(系譜).

⑥  여지승람(輿地勝覽):조선 성종(成宗)의 명(命)을 받들어 노사신(盧思愼) 등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본떠 조선 각도의 풍속 그 밖의 특기할 만한 사실을 기록한 책, 중종(中宗) 때에 새로 증보한 것이 있음.

⑦  종시일절(終始一節):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개(節介).

⑧  안연(晏然):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한 모양, 즉 안여(晏如).

⑨  도멸(屠滅):죽여 없앰, 멸망시킴.

⑩  귀의(歸依):돌아가 의지함, 절대자에게 순종함.

⑪  대려지맹(帶礪之盟):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뜻으로 같이 작게 되어도 국토(國土)는 멸망(滅亡)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신(功臣)의 집은 영구(永久)히 단절(斷絶)시키지 않겠다는 맹서(盟誓).

⑫  도탄(塗炭):흙탕물과 숯불, 즉 몹시 곤란하고 고통스러운 지경.

⑬  태상(太常):제사(祭祀)와 증시(贈諡)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태상부시(太常府寺) 또는 전의시(典儀寺), 봉상시(奉常寺).

⑭  온축(蘊蓄):물건을 많이 모아서 쌓음, 즉 학문ㆍ기예 등의 소양이 깊음.

⑮  교조(敎詔):가르치고 알림.

⑯  백무농상(百畝農桑):중국 하(夏)나라ㆍ은(殷)나라ㆍ주(周)나라 시대(時代)의 정전제(井田制)에서 한 가구(家口)가 받던 전지(田地), 1정(一井)은 900무(九百畝)인데 중앙의 100무(百畝)는 공전(公田)으로 공동 경작하여 조세(租稅)로 바치고 주위의 800무(八百畝)는 여덟 가구(家口)에 나누어 주던 사전(私田).

⑰   치소(治所):지방관청이 있는 곳.

⑱   민멸(泯滅):다하여 없어짐, 즉 망(亡)함.

⑲   토구(菟裘):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은거(隱居)한 곳, 전(轉)하여 은거지(隱居地).

⑳   하구(瑕丘):노환공(魯桓公)의 서자(庶子)가 식읍(食邑)한 곳으로 뒤에 성(姓)으로 삼았다.

㉑   입언군자(立言君子):후세(後世)에 경계가 될 만한 훌륭한 말, 의견(意見)을 세상(世上)에 발표(發表)하는 일.

 

 

p003.png 시조공 벽진장군 사실기(始祖公碧珍將軍事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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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 이공(李公)의 휘(諱)는 총언(忩言)이니 곧 우리 이씨(李氏)의 시조(始祖)이다. 세계(世系)가 아득하고 멀어서 그 상세(詳細)한 것은 고증(考證)할 수 없으나 오히려 국사(國史)에 나타난 것은 가(可)히 징험(徵驗)되어 믿을 수 있다.

 

삼가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건대 왕순식부전(王順式附傳)에 이르기를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李忩言)이 신라 말(新羅末)에 벽진(碧珍)고을을 보전(保全)하고 있었는데 이때 도적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忩言)이 성(城)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百姓)들이 그 덕(德)을 입어 평안(平安)하였다.” 이에 태조(太祖)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하자고 효유(曉諭)하니 총언(忩言)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군사(軍士)를 거느리고 태조(太祖)를 좇아 정토(征討)케 하였다. 영(永)의 그때 나이 18세(十八歲)였다. 太祖以大匡思道貴女妻之하고 총언(忩言)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임명(任命)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 229호(二百二十九戶)를 더 주고 또 충주(忠州) 원주(原州) 광주(廣州) 죽주(竹州) 제주(堤州)의 창곡(倉穀) 2,200석(二千二百石)과 소금 1,785석(一千七百八十五石)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親書)를 보내어 금석(金石)같은 신표(信標)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子孫)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變)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忩言)이 이에 감격(感激)하여 군정(軍丁)을 단결(團結)시키고 군량(軍糧)을 저축(貯蓄)하여 고성(孤城)으로써 신라(新羅)와 후백제(後百濟)가 반드시 쟁취(爭取)하려는 지역(地域)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屹然)히 동남(東南)의 성원(聲援)이 되었다. 태조(太祖) 22년(二十二年) 무술(戊戌,938) 7월 임자일(壬子日)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81세(八十一歲)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家乘)과 여지승람(輿地勝覽)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大義)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함에 이총언(李忩言)에게 명(命)하여 벽진(碧珍) 옛 터를 진호(鎭護)케 하고 이웃 고을 민세(民稅)로써 식록(食祿)케 하여 백자천손(百子千孫)까지 종시일절(終始一節)의 맹서(盟誓)를 맺어 신하(臣下)의 예(禮)로써 대우(待遇)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 태조(高麗太祖)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할 때에 이총언(李忩言)이 벽진태수(碧珍太守)로서 오직 의연(毅然)히 항복(降伏)하지 아니하고 동남(東南)의 명성(名聲)과 위세(威勢)로 서로 의지(依支)하여 안연(晏然)하였다. 태조(太祖)가 도멸(屠滅)코자 하였으나 총언(忩言)과는 예부터 친(親)한 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忩言)도 또한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이미 왕씨(王氏)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永)으로 하여금 태조(太祖)에게 귀의(歸依)케 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여 총언(忩言)을 봉(封)해서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삼고 혼인(婚姻)을 맺어 대려(帶礪)의 맹서(盟誓)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아! 공(公)은 신라 말(新羅末) 도탄(塗炭)의 때를 만나 고성(孤城)을 지키고 백성(百姓)을 어루만져 덕망(德望)과 위의(威儀)가 진실로 드러났으며 한 나라가 거듭 수복(率服)될 즈음에 새 임금을 만나 대업(大業)을 도와서 풍성(豊盛)한 공훈(功勳)과 위대(偉大)한 충렬(忠烈)이 태상(太常)에 기록(記錄)되고 역사(歷史)에 실렸으니 어찌 그리 훌륭하였으리오! 그러나 이미 사업(事業)이 밖으로 드러남이 이와 같다면 반드시 덕행(德行)이 안으로 온축(蘊蓄)됨이 있으련만 도리어 문헌(文獻)의 징거(徵據)가 없어 능(能)히 상세(詳細)한 설명(說明)을 못하니 슬프고 애석(哀惜)하도다. 일찍이 듣건대 군자(君子)가 도통(道統)을 전(傳)하면 후인(後人)들이 가(可)히 이었다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공자(孔子)가 도학(道學)으로써 천하만세(天下萬世)에 교조(敎詔)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결(契)이 오륜(五倫)을 가르친 데에서 나왔고 맹자(孟子)가 백무농상(百畝農桑)으로써 제(齊)나라와 양(梁)나라의 임금에게 권(勸)하였으나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보면 직(稷)이 백곡(百穀)을 뿌린 데에서 나온 것이니 크고 작음과 미미하고 드러남이 비록 같지 않으나 단서(端緖)의 출처(出處)는 가(可)히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공(公) 후손(後孫)의 명성(名聲)과 덕행(德行)의 실상(實相)을 좇아 그 근본(根本)을 거슬러 찾아보면 거의 공(公)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로다.

 

공(公)의 후손(後孫)이 번성(蕃盛)해서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이 되고 고려조(高麗朝)와 조선조(朝鮮朝)의 명현(名賢)과 거공(鉅公)이 우뚝하게 나타났으니 이를테면 대제학(大提學) 견간(堅幹), 문정공(文靖公) 극송(克松), 도원수(都元帥) 희경(希慶), 전서(典書) 존인(存仁), 정간공(靖簡公) 맹전(孟專)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 판서(判書) 승원(承元), 성산군(星山君) 식(軾), 대사성(大司成) 철균(鐵均), 좌찬성(左贊成) 승언(承彦), 정도공(貞度公) 장곤(長坤), 승지(承旨) 언영(彦英), 참의(叅議) 석경(碩慶), 세마(洗馬) 후경(厚慶), 세마(洗馬) 흘(屹), 충숙공(忠肅公) 상길(尙吉),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 감사(監司) 상일(尙逸), 현령(縣令) 세옥(世玉), 효헌공(孝獻公) 세환(世瑍), 봉조하(奉朝賀) 세근(世瑾) 등(等)이 혹(或)은 문장(文章)이나 학행(學行)으로 드러났고 혹(或)은 청백(淸白)이나 절의(節義) 또는 사업(事業)으로 명망(名望)이 당시(當時)에 나타나서 성문(聲聞)이 후세(後世)까지 널리 전(傳)해졌으며 그 밖에도 명현(名賢)과 석학(碩學)이 또한 많이 빛났으니 어찌 그 근본(根本)이 없고서야 그러했겠는가?

또 가만히 듣건대 “산화공(山花公)의 증손(曾孫) 희길(希吉)이 원(元)나라에 들어가서 운남(雲南)에 살았는데 그 후손(後孫)으로 이성량(李成樑)이 있어 아들인 제독(提督) 여송(如松)을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救)할 때에 본국(本國)이라고 일컬으면서 심력(心力)을 다해 힘쓴 뜻은 대개 의의(意義)가 있었다.”고 이르기도 한다.

 

벽진(碧珍)은 지금 경상우도(慶尙右道) 성주목(星州牧)이니 시조공(始祖公)께서 일어나신 땅으로서 자손(子孫)들이 이로 인(因)해서 관향(貫鄕)을 삼았다. 치소(治所) 서(西)쪽 15리(十五里)의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은 곧 공(公)의 유허(遺墟)이고 그 좌강(左岡) 수백보(數百步)는 곧 공(公)의 묘소(墓所)였으나 임진병란(壬辰兵亂) 이후(以後)로는 그 장소를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일찍이 설단(設壇)하여 봉사(奉祀)하게 되었다.

 

고종 원년(高宗元年) 갑자(甲子,1864)에 후손(後孫)들이 보첩(譜牒) 간행(刊行)을 위(爲)하여 유허(遺墟)에서 모였는데 세월(歲月)이 오래되면 민멸(泯滅)될까 크게 두려워해서 비(碑)를 다듬어 비문(碑文)을 쓰고자 하면서 나에게 의론(議論)하거늘 내가 말하기를 “우리 시조공(始祖公)의 후덕(厚德)과 풍공(豊功)은 진실로 만자손(萬子孫)의 근본(根本)이 되고 토구(菟裘)의 땅과 하구(瑕丘)의 집에 이르러서는 또한 능(能)히 수백천년(數百千年)까지 보수(保守)하게 되었으니 어찌 성대(盛大)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조선(祖先)의 유덕(遺德)을 소술(紹述)하는 것은 근본(根本)이요 조선(祖先)의 구기(舊基)를 수호(守護)하는 것은 말단(末端)이니 우리 백세지친(百世之親)이 되는 이는 진실로 그 말단(末端)을 소홀히 하는 것도 옳지 아니하거니와 더욱 그 근본(根本)에 힘써야 마땅할 것이다. 이것이 그 영구불변(永久不變)의 도리(道理)가 되는 것이니 조선(祖先)의 영혼(靈魂) 또한 반드시 오르내리면서 나도 후손(後孫)이 있다 하리라.”고 하였다.

내 어리석으나 삼가 순서(順序)에 따라 이 사적을 기록(記錄)하였으니 당세(當世)의 입언군자(立言君子)를 뵈옵고 기리는 글을 청(請)하도록 하여라.

고종(高宗) 을축(乙丑,1865) 9월 11일 후손(後孫) 항로(恒老) 근서(謹書)

 

    【주해(註解)】

①  징험(徵驗):앞서 보인 징조가 들어맞음.

②  효유(曉諭):타이름, 깨우쳐 줌.

③  신표(信標):뒷날에 보고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하여 서로 나누어 갖는 표.

④  흘연(屹然):홀로 서서 굴하지 아니하는 모양. 즉 의연(毅然)히 지조가 굳고 엄한 모양.

⑤  가승(家乘):한 집안의 역사, 집안의 계보(系譜).

⑥  여지승람(輿地勝覽):조선 성종(成宗)의 명(命)을 받들어 노사신(盧思愼) 등이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본떠 조선 각도의 풍속 그 밖의 특기할 만한 사실을 기록한 책, 중종(中宗) 때에 새로 증보한 것이 있음.

⑦  종시일절(終始一節):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절개(節介).

⑧  안연(晏然):마음이 편안하고 침착한 모양, 즉 안여(晏如).

⑨  도멸(屠滅):죽여 없앰, 멸망시킴.

⑩  귀의(歸依):돌아가 의지함, 절대자에게 순종함.

⑪  대려지맹(帶礪之盟):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뜻으로 같이 작게 되어도 국토(國土)는 멸망(滅亡)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공신(功臣)의 집은 영구(永久)히 단절(斷絶)시키지 않겠다는 맹서(盟誓).

⑫  도탄(塗炭):흙탕물과 숯불, 즉 몹시 곤란하고 고통스러운 지경.

⑬  태상(太常):제사(祭祀)와 증시(贈諡)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 태상부시(太常府寺) 또는 전의시(典儀寺), 봉상시(奉常寺).

⑭  온축(蘊蓄):물건을 많이 모아서 쌓음, 즉 학문ㆍ기예 등의 소양이 깊음.

⑮  교조(敎詔):가르치고 알림.

⑯  백무농상(百畝農桑):중국 하(夏)나라ㆍ은(殷)나라ㆍ주(周)나라 시대(時代)의 정전제(井田制)에서 한 가구(家口)가 받던 전지(田地), 1정(一井)은 900무(九百畝)인데 중앙의 100무(百畝)는 공전(公田)으로 공동 경작하여 조세(租稅)로 바치고 주위의 800무(八百畝)는 여덟 가구(家口)에 나누어 주던 사전(私田).

⑰   치소(治所):지방관청이 있는 곳.

⑱   민멸(泯滅):다하여 없어짐, 즉 망(亡)함.

⑲   토구(菟裘):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은거(隱居)한 곳, 전(轉)하여 은거지(隱居地).

⑳   하구(瑕丘):노환공(魯桓公)의 서자(庶子)가 식읍(食邑)한 곳으로 뒤에 성(姓)으로 삼았다.

㉑   입언군자(立言君子):후세(後世)에 경계가 될 만한 훌륭한 말, 의견(意見)을 세상(世上)에 발표(發表)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