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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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01.png 견간(堅幹)

자(字)는 직경(直卿)이요, 호(號)는 국헌(菊軒) 또는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하고 시(諡)는 문안공(文安公)이시다. 고려(高麗)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왕(忠肅王) 삼조(三朝)에 걸쳐 벼슬을 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상호군(知密直司事上護軍)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28년(二十八年)(곧 송공제(宋恭帝) 대덕(大德) 임인년(壬寅年)이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서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로 부임하여 읊은 시(詩)에 “한 깃발 휘날리며 관동(關東)에 도임(到任)하니, 2월(二月) 봄바람에 한식절(寒食節)이 다하련다. 이번 가는 말머리에 좋은 구절 얻으리니, 자고새 멀리 울고 해당화 붉게 피네.”라 하였다. 또 ‘감로사사운시(甘露寺四韻詩)’가 있으니 “선경(仙境)을 드나들 제 가슴이 트이더니, 즐겁다 이 연방(蓮坊)은 성시(城市)를 멀리했네. 3면(三面)에 푸른 산은 반공(半空)에 솟아있고, 한 자락 트인 곳엔 강물소리 시원하다. 앞마을 아득하게 어등(漁燈)이 가물거리고, 별원(別院)은 쓸쓸한데 안탑(雁塔)이 분명하네. 임금님 받들어서 만수무강(萬壽無疆) 비옵나니, 자니(紫泥)를 내리시어 백의생(白衣生)을 부르소서.”라 하였다. 이는 모두 ‘동시선(東詩選)’에 실려 있다.

 

충숙왕(忠肅王) 4년(四年) 정사(丁巳, 1317)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상주(常州)의 객관(客館)에 유숙(留宿)하면서 두견새의 소리를 듣고 시(詩) 한 수를 읊으니 “여관에서 잠 아니 와 등잔심지 돋우려니, 중화(中華)에 사신가는 풍미(風味) 스님보다 담담(淡淡)하네,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도록 들리나니, 산꽃의 몇째 가지에서 울고 있는지.”라 하였다. 이 시(詩)가 중국(中國)에 널리 알려지니 중국인(中國人)이 그 구법(句法)의 절묘(絶妙)함에 탄복하여 시(詩) 한 연(聯)을 이어 지었으니 “산화(山花)의 시구(詩句)는 천지(天地)와 함께 있어, 강남(江南) 곳곳 난간마다 적혀지누나. 알겠도다 청연거사(靑蓮居士)가 간 뒤로도 일가(一家) 이룬 풍월(風月)이 그 자손(子孫)에 전해져온 것을.”이라 하였다. 이로해서 당세(當世)에 명망(名望)이 높아 사람들이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동시선(東詩選)’에 뽑아 넣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동방(東方)에서 두견을 읊은 네 절창(絶唱) 가운데 이공(李公)의 시가 더욱 고묘(高妙)하다.”고 하였다. 원제(元帝)가 매우 총애하여 거주하는 지명을 물으니 우리 음(音)으로 ‘호음곡(好音谷:홈실)’이라고 써서 대답하였다. 원제(元帝)가 명자(椧字)를 지어 하사하니 명곡(椧谷)이라 칭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이며, 중국인들이 명곡이씨(椧谷李氏)라고 이르는 것도 이로해서이다.

 

이정헌(李定軒) 설(渫)이 지은 ‘서정록(西征錄)’ 후서(後序)에 이르기를,

선생(先生)은 덕행(德行)이 높고 학문(學問)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선진(先秦)의 예악(禮樂), 성당(盛唐)의 문장(文章)’으로 칭송(稱頌)했으며,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의 시대에 벼슬에 올라 20년(二十年) 동안이나 사명(詞命)의 자리를 맡아 있었으니 중국(中國)의 사대부(士大夫)들까지도 그 풍채(風采)를 상망(想望)하여 잊지 않았습니다.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태학사(太學士) 주방(周昉)이 함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講論)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再拜)하면서 “선생(先生)은 천하(天下)의 선비이십니다. 삼한(三韓)의 문화(文化)가 이런 경지에 다다른 줄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내가 운곡(耘谷) 원선생(元先生)에게서 듣기를, “고려중엽(高麗中葉)에 선비가 많았다고 하나 진실로 유자(儒者)의 도(道)를 따른 사람은 좨주(祭酒) 우탁(禹倬)과 문안(文安) 이견간(李堅幹)과 문충(文忠) 이제현(李齊賢) 등 몇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좨주(祭酒)의 역학(易學)과 문안(文安)의 춘추(春秋)는 비록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專門家)라 하더라도 앞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안(文安)과 문충(文忠)은 인품(人品)이 대단히 높아 나라에 바치는 충성심(忠誠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經綸)은 가(可)히 육선공(陸宣公)과 동열(同列)에 설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p001.png  성간(成幹)

고려(高麗) 충렬(忠烈)ㆍ충선(忠宣) 양조(兩朝)를 섬기어 벼슬이 중문지후(中門祗候)를 역임(歷任)하고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다. 타고난 자질(姿質)이 뛰어나게 총명(聰明)하고 재능(才能)과 도량(度量)이 크고 넓어서 일찍이 백형(伯兄) 산화선생(山花先生)을 쫓아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학업(學業)에 독실(篤實)히 힘써서 문학(文學)과 기예(技藝)가 일찍이 성취(成就)하였으므로 조정(朝廷)에 발탁(拔擢)되어 중문지후(中門祗候)에 보임(補任)되었다. 충성(忠誠)된 마음으로 임금을 보좌(補佐)함에 겉으로는 약(弱)하나 안으로는 매우 강(强)하여 충성(忠誠)ㆍ절의(節義)ㆍ지혜(智慧)ㆍ용기(勇氣)가 뭇 사람보다 뛰어났으므로 임금의 총애(寵愛)와 대우(待遇)가 매우 두터워서 승질(陞秩)의 은전(恩典)을 입어 위계(位階)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잘못된 정치(政治)를 바로잡아 고침에 오직 정의(正義)로써 수행(遂行)하니 사람들이 그 청덕(淸德)을 칭송(稱頌)하였는데 오히려 권신(權臣)들의 간계(奸計)로 인(因)해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서 잠시(暫時) 머물면서 세태추이(世態推移)를 정관(靜觀)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삼도봉(三道峰) 아래 한송정(寒松亭)에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世上)에 이름이 드날리기를 바라지 않고 자정(自靖)하여 만년(晩年)을 보내면서도 매양 나라 정치(政治)를 염려(念慮)하여 항상(恒常) 송경(松京)을 사모(思慕)하였다. 옛 선조(先祖)께서 그 유허(遺墟)에 모원당(慕遠堂)을 세워서 해마다 한번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p001.png  당개(唐蓋)

벼슬이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금릉백(金陵伯)에 봉(封)하여졌다.

 

p001.png  극송(克松)

호(號)는 빙옥재(氷玉齋)이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이다. 백운(白雲) 이규보선생(李奎報先生)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여 고려(高麗) 고종(高宗) 23년(二十三年) 병신(丙申, 1236)에 명경과(明經科) 장원(壯元)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판삼사(判三司) 겸 지사관(兼知史館)에 이르렀다. 일찍이 임금이 상찬(賞贊)하기를 “한옥(寒玉)같은 정자(貞姿)요 추수(秋水)같은 정신(精神)이라”고 하면서 인(因)해 빙옥재(氷玉齋)라 사호(賜號)하였다. 원우(院宇)가 옛날에는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에 있었으나 임진란(壬辰亂)에 소실(燒失)되고 그 뒤 숙종(肅宗) 10년(十年) 갑자(甲子, 1684)에 의성(義城) 봉강사(鳳岡祠)에 복향(復享)하였다. 고종(高宗) 7년(七年) 경오(庚午, 1870)에 방령(邦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임신년(壬申年, 1932)에 이르러 옥수당(玉水堂)을 성주(星州) 어동(漁洞)에 창건(創建)하여 매세(每歲) 한번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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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01.png 견간(堅幹)

자(字)는 직경(直卿)이요, 호(號)는 국헌(菊軒) 또는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하고 시(諡)는 문안공(文安公)이시다. 고려(高麗)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왕(忠肅王) 삼조(三朝)에 걸쳐 벼슬을 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상호군(知密直司事上護軍)에 이르렀다. 충렬왕(忠烈王) 28년(二十八年)(곧 송공제(宋恭帝) 대덕(大德) 임인년(壬寅年)이다.)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로서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로 부임하여 읊은 시(詩)에 “한 깃발 휘날리며 관동(關東)에 도임(到任)하니, 2월(二月) 봄바람에 한식절(寒食節)이 다하련다. 이번 가는 말머리에 좋은 구절 얻으리니, 자고새 멀리 울고 해당화 붉게 피네.”라 하였다. 또 ‘감로사사운시(甘露寺四韻詩)’가 있으니 “선경(仙境)을 드나들 제 가슴이 트이더니, 즐겁다 이 연방(蓮坊)은 성시(城市)를 멀리했네. 3면(三面)에 푸른 산은 반공(半空)에 솟아있고, 한 자락 트인 곳엔 강물소리 시원하다. 앞마을 아득하게 어등(漁燈)이 가물거리고, 별원(別院)은 쓸쓸한데 안탑(雁塔)이 분명하네. 임금님 받들어서 만수무강(萬壽無疆) 비옵나니, 자니(紫泥)를 내리시어 백의생(白衣生)을 부르소서.”라 하였다. 이는 모두 ‘동시선(東詩選)’에 실려 있다.

 

충숙왕(忠肅王) 4년(四年) 정사(丁巳, 1317)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다가 상주(常州)의 객관(客館)에 유숙(留宿)하면서 두견새의 소리를 듣고 시(詩) 한 수를 읊으니 “여관에서 잠 아니 와 등잔심지 돋우려니, 중화(中華)에 사신가는 풍미(風味) 스님보다 담담(淡淡)하네, 창 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도록 들리나니, 산꽃의 몇째 가지에서 울고 있는지.”라 하였다. 이 시(詩)가 중국(中國)에 널리 알려지니 중국인(中國人)이 그 구법(句法)의 절묘(絶妙)함에 탄복하여 시(詩) 한 연(聯)을 이어 지었으니 “산화(山花)의 시구(詩句)는 천지(天地)와 함께 있어, 강남(江南) 곳곳 난간마다 적혀지누나. 알겠도다 청연거사(靑蓮居士)가 간 뒤로도 일가(一家) 이룬 풍월(風月)이 그 자손(子孫)에 전해져온 것을.”이라 하였다. 이로해서 당세(當世)에 명망(名望)이 높아 사람들이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동시선(東詩選)’에 뽑아 넣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동방(東方)에서 두견을 읊은 네 절창(絶唱) 가운데 이공(李公)의 시가 더욱 고묘(高妙)하다.”고 하였다. 원제(元帝)가 매우 총애하여 거주하는 지명을 물으니 우리 음(音)으로 ‘호음곡(好音谷:홈실)’이라고 써서 대답하였다. 원제(元帝)가 명자(椧字)를 지어 하사하니 명곡(椧谷)이라 칭하게 된 것은 이로부터이며, 중국인들이 명곡이씨(椧谷李氏)라고 이르는 것도 이로해서이다.

 

이정헌(李定軒) 설(渫)이 지은 ‘서정록(西征錄)’ 후서(後序)에 이르기를,

선생(先生)은 덕행(德行)이 높고 학문(學問)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선진(先秦)의 예악(禮樂), 성당(盛唐)의 문장(文章)’으로 칭송(稱頌)했으며,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의 시대에 벼슬에 올라 20년(二十年) 동안이나 사명(詞命)의 자리를 맡아 있었으니 중국(中國)의 사대부(士大夫)들까지도 그 풍채(風采)를 상망(想望)하여 잊지 않았습니다.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태학사(太學士) 주방(周昉)이 함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講論)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再拜)하면서 “선생(先生)은 천하(天下)의 선비이십니다. 삼한(三韓)의 문화(文化)가 이런 경지에 다다른 줄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내가 운곡(耘谷) 원선생(元先生)에게서 듣기를, “고려중엽(高麗中葉)에 선비가 많았다고 하나 진실로 유자(儒者)의 도(道)를 따른 사람은 좨주(祭酒) 우탁(禹倬)과 문안(文安) 이견간(李堅幹)과 문충(文忠) 이제현(李齊賢) 등 몇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좨주(祭酒)의 역학(易學)과 문안(文安)의 춘추(春秋)는 비록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專門家)라 하더라도 앞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문안(文安)과 문충(文忠)은 인품(人品)이 대단히 높아 나라에 바치는 충성심(忠誠心)과 나라를 다스리는 경륜(經綸)은 가(可)히 육선공(陸宣公)과 동열(同列)에 설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p001.png  성간(成幹)

고려(高麗) 충렬(忠烈)ㆍ충선(忠宣) 양조(兩朝)를 섬기어 벼슬이 중문지후(中門祗候)를 역임(歷任)하고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다. 타고난 자질(姿質)이 뛰어나게 총명(聰明)하고 재능(才能)과 도량(度量)이 크고 넓어서 일찍이 백형(伯兄) 산화선생(山花先生)을 쫓아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학업(學業)에 독실(篤實)히 힘써서 문학(文學)과 기예(技藝)가 일찍이 성취(成就)하였으므로 조정(朝廷)에 발탁(拔擢)되어 중문지후(中門祗候)에 보임(補任)되었다. 충성(忠誠)된 마음으로 임금을 보좌(補佐)함에 겉으로는 약(弱)하나 안으로는 매우 강(强)하여 충성(忠誠)ㆍ절의(節義)ㆍ지혜(智慧)ㆍ용기(勇氣)가 뭇 사람보다 뛰어났으므로 임금의 총애(寵愛)와 대우(待遇)가 매우 두터워서 승질(陞秩)의 은전(恩典)을 입어 위계(位階)가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잘못된 정치(政治)를 바로잡아 고침에 오직 정의(正義)로써 수행(遂行)하니 사람들이 그 청덕(淸德)을 칭송(稱頌)하였는데 오히려 권신(權臣)들의 간계(奸計)로 인(因)해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故鄕)으로 돌아와서 잠시(暫時) 머물면서 세태추이(世態推移)를 정관(靜觀)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삼도봉(三道峰) 아래 한송정(寒松亭)에 자취를 감추었다. 세상(世上)에 이름이 드날리기를 바라지 않고 자정(自靖)하여 만년(晩年)을 보내면서도 매양 나라 정치(政治)를 염려(念慮)하여 항상(恒常) 송경(松京)을 사모(思慕)하였다. 옛 선조(先祖)께서 그 유허(遺墟)에 모원당(慕遠堂)을 세워서 해마다 한번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p001.png  당개(唐蓋)

벼슬이 고려조(高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금릉백(金陵伯)에 봉(封)하여졌다.

 

p001.png  극송(克松)

호(號)는 빙옥재(氷玉齋)이며 시호(諡號)는 문정공(文靖公)이다. 백운(白雲) 이규보선생(李奎報先生) 문하(門下)에서 수업(受業)하여 고려(高麗) 고종(高宗) 23년(二十三年) 병신(丙申, 1236)에 명경과(明經科) 장원(壯元)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판삼사(判三司) 겸 지사관(兼知史館)에 이르렀다. 일찍이 임금이 상찬(賞贊)하기를 “한옥(寒玉)같은 정자(貞姿)요 추수(秋水)같은 정신(精神)이라”고 하면서 인(因)해 빙옥재(氷玉齋)라 사호(賜號)하였다. 원우(院宇)가 옛날에는 성주(星州) 가리현(加利縣)에 있었으나 임진란(壬辰亂)에 소실(燒失)되고 그 뒤 숙종(肅宗) 10년(十年) 갑자(甲子, 1684)에 의성(義城) 봉강사(鳳岡祠)에 복향(復享)하였다. 고종(高宗) 7년(七年) 경오(庚午, 1870)에 방령(邦令)으로 훼철(毁撤)되었다가 임신년(壬申年, 1932)에 이르러 옥수당(玉水堂)을 성주(星州) 어동(漁洞)에 창건(創建)하여 매세(每歲) 한번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