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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기(敬收堂記). 1864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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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덕명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04-01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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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당기(敬收堂記) 1864年 

가야산伽倻山 동쪽에 있는 성주는 산천의 수려秀麗함과인물을 배출함에 있어, 

경주慶州 진주晋州 상주尙州 복주福州:安東와 서로 앞을 다투며 스스로 큰 고을을 이룬다. 

국사와야사를 상고하건데, 이미 선배들이 지은 글 속에 이런 사실이 갖추어져 있으니 다시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갑자甲 1864년 봄에 족보 일로 인하여 단소所에 머물면서 오랫동안 지세의 아름다움을 두루 돌아보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훌륭한 땅으로서 지금은 명암방明巖坊 수촌樹村이라 일컫는데, 여기가 우리 시조 벽진부군碧珍府君께서 예전
에 살던 곳임을 알리고 있다. 

외로운 성城에서 성원聲援하신 일은 신라新羅 말기末期에 뛰어나시고 천호의 봉읍封邑:食邑을 받은 일은 고려 초기初期에 특출하셨으니
빈:周나라 서울을 떠나서 양산梁山을 넘은 것과<周의 遠祖 大王의 故事> 같이 조상이 옮겨 사신 것은 어느 시대이
었는지는 모르겠지마는, 산화공이 명곡에서 생장하시어 나라를 빛낸 계책으로서 명망名望이 천하에 퍼졌으니,
옛일을 회고하건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개感槪한 눈물이 흘려내려 옷깃을 적시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우리 시조의 수천 후손들이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다만 1년에 한 차례씩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고 다행히 전
해지고 있으나 남아있는 재사齋舍가 오히려 소박하여 감坎 한 채와 당堂 한 채가 있는데, 서감西坎은 두 칸 장방
長房으로 비록 노나라의 큰 집인 영광전靈光殿만은 못하지마는 운곡雲谷의 곁 이천伊川가에 우뚝이 서 있는데도
한자의 편액도 없으니 아! 슬프도다.면상綿上을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개산봉이라 일컫고 기산箕山에 오르는
사람은 허유許由)의 무덤이라고 이르는 사람도 있는데, 두예杜預의 침비는 무슨 일이었으며 악의樂毅:전
국시대 연나라 장수의 무덤길을 징험徵驗할 바 없는 것 같이 길가는 나그네들이 이 지점을 가리켜 “벽진이씨 단소壇所
와 재사齋舍이다”라고만 말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운거족종雲擧族從이 도배를 하여 옛모습보다는 약간 나아졌으나 조금 모자라는 것은 명칭이 없
는 것이다. 동감東坎은 화수헌花樹이라 현판懸板을 달고 서감西은 경수당이라 액자를 달고 당 가까이에는
단소壇 두 자를 게시하고 북쪽에는 "벽진이씨 보청譜廳”이 라 크게 써 붙였으니 모두 친구 여응규呂應奎의 서까래 같
은 큰 글씨를 빌린 것이다. 외면으로 보면 불가佛家에 도금한 아름다움 같으나 그 속이 어떠한가는 알지 못하겠다.
이에 갑자기 백천의 흐름이 한 근원에서 비롯되고 만엽의 가지가 하나의 뿌리에서 나누어진다는 것이 생각되어
그 감동으로 7률七律 한수와 오언시詩 한수-首를 읊었으니 어찌 5언五言 7언七言으로 장성長城:名文大家의 솜씨를
얻었다고 하겠는가? 원래 문장을 짓는 일에는 익숙하지 못한데 진실로 운거족종雲擧族從의 성의를 저버릴 수 없어서
마침내 기문을 짓는 바이다.  
1864년 학준 삼가지음

<原文> 象王之東 有星州 山川之秀麗 人物之繁興 相頡頑於慶晋尙福

而自作大雄州於頻表者 攷之國乘與野史 己備於先輩之撰述 不必更贅
子春 因譜事留壇所 久周覽乎地勢之繡錯 真箇是天作之鴻基 而今稱明巖
坊樹村 認是吾始祖碧珍府君古都也 聲援之孤城最於羅季 勳封之千戶優於
麗初 去邠踰梁未知昉於何代 而山花公生長櫛谷 以華國手段名聞天下 追
惟往事 滄桑之感 淚迸出不覺沾襟 惟吾祖數千雲孫 夫孰不然哉 維歲一祀
幸傳不替所存齋舍尙樸 坎一堂 一西坎則 通二間長房 雖不若魯靈光 巋
然突立於雲谷傍伊川濱 而無一字扁楣 噫嘻痛矣 過綿上者必稱日 介山封
登箕山者 盖有云許由塚而杜預之沉碑 何事樂毅之封墬無徵 行人之指點不
過曰 碧珍李氏壇所齋舍而己 同吾志雲擧族從 塗泥排紙稍勝於昔貌樣 而
少欠者無稱 東坎則扁以花樹軒 西坎則額而敬收堂 近則揭以壇所二字 堂
北則大書碧珍李氏譜廳 皆借得來呂友應奎如椽之筆也 以外面觀之 有若佛
像塗金之美 而不知其裏之如何 於是乎倏爾思 百川之派流始於同源 萬葉
之枝分委於一根 感以吟七律一五言一 安得以五七長城云乎哉 素不嫺於文
字上攸爲 而固不負雲舉從之誠 遂為之記 甲子 學竣 謹撰

출처: 一何亭 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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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 29세손  일하정(一何亭) 諱 학준(學俊)(1798~1870)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의 12세손

묘 합천 숭산면 황령촌 약산.
여러번 도추에 올랐는데 천거의 요지에
경학에 침잠함은 왕이 못속에 있는것과같다 하고,임하에서 독서를하고,안빈낙도 하였다.
일하정기는 화서이항로선생이 지었고. 행장은 족승손 우형이짓고. 갈명은 산화 권용현이지었다.
일하정문집이있다.

17대조 평정공 노촌 이약동의 노촌실기에 편찬 간행에참여함.

18대조 합천 판서공(승원) 재실 영모재실을 창건하고 신창기를 남김
직장공 27대 거유 애국지사 화서 이항로선생이  일하정(一何亭)호號 와 일하정기 (一何亭記)짓고,

혈족으로서의 애정 어린 인연을 갖고 있으며, 일하정 문집과 화서 문집에 두 선조의 오고간 서신이 수록되어 전하고있다.
碧珍李氏 文獻錄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潁敏)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았다. 자라서는 금곡(錦谷) 송선생(宋先生)의 중용강론(中庸講論)을 들었는데 금곡(錦谷)이 여러번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모(李某)에게 처음으로 중용(中庸)의 심오(深奧)한 뜻을 들었다』하고 또 홍매산(洪梅山)과 이화서(李華西) 제현을 좇아 교유(交遊)하였는데 다들 장려(獎勵)하고 칭예(稱譽)하여 허교(許交)하였다. 간혹 일찍이 과시(科試)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거연(居然)히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하고 별로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어진 경재(卿宰 : 공경사대부(公卿士大夫))들과 사귀는 인연이 되어 선현(先賢)과 조선(祖先)의 미적(美蹟)을 강론하고 포장(褒章)함으로 모든 공(公卿)들이 몸을 낮 추어 굽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살고있는 고을에 용호원(龍湖院)이 있으니 동계(桐溪) 정온선생(鄭蘊先生)을 제사하는 곳으로서 공(公)이 일찍부터 힘을 다하여 관리경영(管理 經營)하고 그 원(院)에 주강(主講)이 되어 엄숙한 규약으로 여러 학생을 창도(唱導)하고 인솔하여 유풍(儒風)을 진흥케 하니 향중(鄕中)이 공을 의뢰(依賴)하였다. 항상 고상한 풍채를 가져 연연(戀戀)하여 머뭇거리고 아첨하는 태도 (態度)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때 청고(淸高)를 지키고 자처 (自處)하는 몇 분의 인사(人士)도 반드시 공(公)으로 수반(首班)을 삼았다.일찍이 경학(經學)과 유행(儒行)으로 향천(鄕薦)과 도천(道薦) 그리고 수의어사(繡衣御使)의 천거(薦擧)가 여러번 있었으되 마침내 처사(處 士)로 돌아가셨으니 공의(公議)는 애석해 하지마는 공의 심사(心思)는 어찌 손상함이 있었으리오. 

화산(花山 : 세칭유종(世稱儒宗)) 권용현(權龍鉉)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서 

공이 여덟살때 어른들이 조선(朝鮮)으로 제목(題目)하여 시(詩)를 지으라 명령하니, 문득 지어 말하기를 『일월(日月)의 밝은 빛이여 아침마다 거듭되도다』하니 좌중(座中)이 다 경탄하였다. 이로써 공의 재지(才智) 가 뛰어났음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일찍이 학덕이 높은 선생의 문하(門 下)에 경례(敬禮)를 갖추고 명현(名賢)과 공명(公卿)의 반열(班列)에 종유 (從遊)하였으니,  용전(龍田) 송내희(宋來熙) 제주(祭酒)께서 추증(推重)하여 허교(許交)하시고 말하기를 『독서(讀書)한지 四十년만에 들어보지 못한 중용(中庸)의 심오한 뜻을 처사(處士) 이모(李某)는 의문나고 어려운 것을 해부하여 풀어주니 진실로 경학(經學)의 유사(儒士)로다.  사람들이 묻지 않은 바를 물었다』하고 홍매산(洪梅山) 직필(直弼)은 『이모(李某) 는 단아(端雅)한 선비로 더욱이 선현(先賢)을 포미(褒美)하는데 부지런 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종중(宗中)의 어른이신 화서 항로(華西 恒老)께서 일하정기문(一何亭記文)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유행(儒行)은 도(道)에 근접(近接)하고 곤궁(困窮)을 겪어도 안연(晏然)히 처신함이 옛날의 현 인들도 이에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본(本)고을 부사(府使)인 매곡(梅谷) 송계수공(宋啓洙公)도 말씀하기를 『이모(李某)의 말은 아름답기가 문장고 시율(詩律)같아 시(詩)로 꾸민 것이 아니로되 자연히 우러나는 음성이라 일렀더라. 관부(官府)에서 천거(薦擧)한 요지는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유행이 있고 타고난 성(郭 性)이 효우(孝友)하다』고 하였고 도(道)에서 천거(薦擧)한 요지(要旨)는 『경학(經學)에 침잠(沈潛)하여 주옥(珠玉)이 못물에 잠겨있는 것 같다』고 하였으며 비단옷 입은 암행어사(暗行御使)도 임하(林下 • 자연(自然))에서 독서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유사(儒士)라는 요지로 공을 천거(薦擧)하였었다.
공의 학문과 행의가 실질적이고 깊이 감추어진 포부가 중후함이 이와 같음에도 마침내 당세에 대우받은 바가 없이 불운(不運)하여 곤궁하게 사시다가 세상에서 돌아가시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으랴。
족증손(族曾孫) 우형愚亨이 지은 행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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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정집(一何亭集) 文獻

조선 후기의 학자 이학준의 시문집. 1956년 현손 창기가 편집, 간행하였다.  4권 1책. 석인본.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一何亭集.  卷1-4  / 李學峻(朝鮮) 著, 石版本
 4卷1冊 : 四周雙邊 半郭 19.6 x 14.7 cm, 有界, 10行24字 註雙行, 上下向2葉花紋魚尾 ; 28.3 x 19.5 cm
序: 丙申(1956)暮春...族曾孫[李]愚亨謹敍
跋: 丙申(1956)端陽節咸從魚命德謹識,
丙申(1956)流頭節慶州崔源謹述, 中元丙申(1956)秋七月旣望曾孫[李]愚甲謹識
소장기관 :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원광대학교 도서관전주대학교 중앙도서관
4권 1책. 석인본. 1956년 현손 창기(昌基)가 편집, 간행하였다.
卷頭에 권용현(權龍鉉)과 족증손 우향(愚享) 등의 서문이 있고,
卷末에 어명덕(魚命德)· 최원(崔源)과 증손 우갑(愚甲) 등의 발문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卷1은 시(詩) 159首,
卷2은 서(書) 37편과 문목(問目),
卷3은 서(序) 7편, 기(記) 11편, 上樑文 2편, 祭文 6편,
卷4는 墓誌 7편, 墓碣銘 3편, 行狀 4편, 事蹟 2편, 附錄으로 기· 만사· 행장· 묘갈명· 차운시(次韻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詩에는 홍석주(洪奭周)· 홍재철(洪在喆)· 이항로(李恒老) 등에게 보낸 증여시(贈與詩), 김경선(金景善)· 김수근(金洙根) 등에게 준 송별시(送別詩),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憶赤城)」· 「탄적상산성황폐난지(歎赤裳山城荒廢難支)」·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聞列邑守令多爲民所逐)」 등이 있다.
서(書)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上龍田宋先生問目)」은 송내희(宋來熙)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상(喪)에 상기(喪期)와 복제(服制)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上李巡相)」은 이기연(李紀淵)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義士龍庵陳公行狀)」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陳遇昌)에 대한 기록이다.

文化委員長  儒珍 善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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