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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珍李氏 族譜의 誕生 (碧珍李氏 最初族譜 임진보(壬辰譜) : 16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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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덕명
댓글 0건 조회 6회 작성일 25-04-0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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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이씨 족보의 탄생 (碧珍李氏 最初族譜 임진보(壬辰譜) : 1652년)

1. 족보의 역사.
족보는 옛날 중국에서 왕실의 계통를 기술한것이 근원이며 , 사가(私家)에서는 한(漢)나라의 관직등용을 위한 현량과(賢良科) 제도를 만들어 후보인물의 내력과 그 선대(先代)의 업적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그 후에 위(魏)나라와 진(晋)나라 때를 거쳐서 남북조시대 (南北朝時代) 에 비로소 학문으로서 보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족보는 고려조가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것이 시작이며, 고려중엽의 의종때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등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신라말기에 귀족 계급에서 성씨를 쓰기 시작해서, 고려초기까지 이어 오다가 11대 문종조 (1047-1082)에 이르러 서는 성씨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 못하게 하는제도가 만들어져서 성씨가 갑자기 많이 생겨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나라 최초에 발간된 족보는 1423년(세종5)의 문화유씨 영락보이나 서문만 전할 뿐 현존하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1476년(성종7)에 발간된 안동권씨 성화보이다. 그 후 1562년(명종)에 발행된 문화유씨 가정보는 내외 자손이 상세히 기록되어 현존하고 있다. 이밖에 강릉김씨 을축보(1565), 능성구씨 만력보(1576)등이있다.
2.벽진이씨 족보 탄생
당시에는 사대부 가계 즉 양반 계층만이 족보를 할 수 있었는데, 우리 문중도 이에 해당하며, 전체 인구 대비로 양반계층은 6%에 불과하던 시대였다.
 1)임진보(壬辰譜) : 1652년
1652년(효종3)인 임진년에 간행한 우리 문중 최초의 한문본 창간족보이다. 이 대동보는 1635년(인조13)에 충숙공 상길(尙吉)선조님께서 완산 부윤으로 계실때 단자를 수집하여 족보를 편집하기 시작하였으나 직책이 바뀌고, 1637년 (인조15)에 병자호란으로 순절하심에 따라 중단되었다.
그로부터 10년후 진주목사로 부임한 그의 종제 감사공 휘 상일께서 이를 완성하기 위하여 준비하든 중에 영남지방에 계파가 다른 일가가 많은 사실을 알고, 함께 단자를 모으고 비용을 부담하면서 효종 임진년에, 성주벽진이씨세보 라는 판각 목판본의 단행본 족보를 간행하였다.
특징은 2남인 대장군공파가 먼저 수록되고, 장남인 산화공파가 다음으로 수록되어 있다. 원본은 유일본으로 전승되고 있었는데, 1983년 증간위원회를 결성하여 간행한 100질의 한정, 영인본이 효종 임진 벽진이씨 세보 라는 이름으로 전하고 있다.

서문(序文) : 이상일(李尙逸)
      식 (識) : 이수억(李壽億)
발문(跋文) : 조시량(曺時亮)

1)임진보서(壬辰譜書)(1652年),
星州에 李氏가 三姓이 있으니 碧珍將軍이 곧 우리의 始祖이다, 新羅末期에 碧珍郡을 保全하니 高麗太祖가 公을 碧珍將軍으로 除授하였다, 아들 諱 永은 知京山府事를 지냈고 그 뒤에 諱 芳華 諱 殷 父子가 모두 光祿大夫로서 벼슬이 代代로 世上에 빛나 그 아름다움을 中世에까지 이어왔고 나의 五代祖인 平靖公 諱 約東에 이러러서는 淸白과 剛正으로서 朝廷에서 뚜렸하였으니 門閥과 官爵이 가히 盛大하다 할수있으나 族譜가 아직 世上에 刊行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크게 哀惜하지 않으리오?

나의 從兄인 尙書公이 일찍이 完山府尹으로 계실 때에 支派의 單子를 蒐輯하여 譜冊을 發刊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事情으로遞職되어 成就하지 못하여서 平素에 歎息해 마지 않았다. 不肖한 이사람이 祖上의 蔭德을 입어서 晉州牧使로 왔는데 일가들이 南方에 사는이가 많았다, 우리 宗人인 進士 見龍과 秀才 壽檍이 이에 傷心하여 宗中에 發議해서 옛 合族하는 禮를 본받아 後世에 傳할 바를 계획하니 이는 宗族을 誇示하고 존중하는 議論이라 어찌 거룩하지 않으리오 ? 생각큰데 내가 비록 보잘 것 없으나 감히 門中의 큰일에 힘쓰지도 않고 平生의 뜻인바 所願을 이루고저 하겠는가 ! 오직 親屬이 이미 다함에 가지가 나누어지고 갈래가 달라지며 服이 끝나고 戚分이 다하여 吉凶事에도 서로 방문하지않고 路上에서 만나도 人事하고 지나가는 이 조차 드물게 되었다.

禮記에 이르되『同姓은 宗家를 따른다』라 하고 또 이르되 『宗家를 恭敬하기 때문에 族親을 뫃이게한다』 고 하였으니 이 때문에 飮食으로 族親을 모으는 禮節이 생기게 되었으니 君子는 드디어 이 일을 所重히 여겼다, 신령스르운 椿나무가 茂盛하게 잎이 퍼저도 그 根本은 한뿌리이며 大姓이 아무리 繁昌해도 그 처음은 한몸이라 動作하고 呼吸하는 元氣가 어버이에게 通했거늘 子孫끼리 남과 같이 지낸다면 이 또한 슬픈일이 아니리오 ? 官俸의 餘分으로 이 일을 마치게되니 우리 氏族의 譜冊이 비로소 只今이나 以後에 流布될것이므로 以後에 나는 子孫들은 모두 注意깊게 보고 敦睦孝悌하는 氣風으로 서로 힘쓴다면 나의 責任은 다한것이되고 諸君들의 일을 繼承하는 道理도 또한 다함이 되리라.

譜役이 完成될 무렵에 諸君이 다시 나에게 請하여 이르되『序文이 없으면 後嗣들이 어떻게 볼것인가 願컨데 번顚末을 적어서 族譜의 끝에 添附케 하소서』 하기에 義理上 拒絶할수없었다. 또한 생각컨데 우리 宗族이 예로부터 뜻은 있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오늘에 이러러 비로서 編纂하였으니 어찌 運數가 있음이 아니랴. 또한 諸君이 없었다면 參考,校正해서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또 諸君에게 付託하노니 이제 見龍,壽億君이 能이 이 役事를 맡아서 尊祖 敬宗의 義理를 다 알게되었다고는 하나 그르나 先代를 빛네고 祖上을 나타나게함이 이것만으로 다헸다고 할수 있으리요 ? 詩經에 이러기를 『너의 祖先을 生覺하지않으랴 그 德을 닦을지어다』라 하였으니 이 族譜가 있드라도 이 德이 없으면 사람들은 오히려『先祖를 辱되게한다』 고 할것이니 우리가 取할바 아니로다. 아 ! 諸君들은 어찌 서로 힘쓰지 않겠는가 ? 이에 참남(僭濫)함을 해아리지 않고 드디어 序文을 쓰노라.
後孫 通訓大夫 晋州牧使兼 春秋  編修官 尙逸謹書


2)壬辰譜識(임진보식)
오호라 이것은 碧珍李氏의 世系인데 年代가임이 멀어저서 分派와 系譜가 분명하지 못한 중에 未詳處가 있으서 간혹 疑心스러운 것이 없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우리 祖父(諱 屹)께서 오래되면 될 수록 더욱더 그 眞實을 잃게 될까바 두려워해서 舊聞을 蒐集하여 世系를 編敍하여서 뒷날의 子孫에게 이어주려하였다. 叔父께서 父母의 喪을 당하여 孝養하지 못하게 된 것을 슬프한 以來 깊이 思慕함이 날로 절실하여 求함이 있어도 얻지 못하였다. 일찍히(본인은) 가르침을 받은것에 바탕을 두고 內外譜를 追成하되, 文獻으로 밝혀지기(徵)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지금바로 宗叔 *昌一氏 (註1) 가 居昌 文氏家의 舊譜를 얻어보게 되었다, 文氏는 李氏의 外孫이라 李氏의 系譜로서는 그 중에있는 것을 참고하였는데 大將軍 諱 成幹은 곧 樞密院事 諱 雍의 次子로서 이 분이 保勝郞將 諱 晟을 낳고 晟이 中郞將 諱 桓을 낳았으니 平靖公(諱 約東)은 그의 玄孫이다.
여기서 이 族譜를 祖父께서 기록하신 바와 비교한즉(서로) 符合되고 다름이 없어 한편으로 先代의 根源과 系統이 詳細하여 기쁘고 또 한편으로 祖父님의 祖上을 追慕하는 정성에 감격하여 더욱더 흥겹게 생각지 않을수 없었다, 아 ! 여기서 系統의 詳細함이 그 族譜에 실려 있어서 우리들이 오늘날에 비로서 알게되니 의문이 남아 있을수 있겠는가. 그간 古語에 이러기를『마음속으로 그것을 정성껏 求하면 얻어진다』 는 것이니 그 말은 믿을수 있도다. 子孫되는자는 거의 걱정이 없겠도다. 어찌 하늘이 장차 李氏의 家門을 열고자 이 族譜를 굳게 간직하여 잃치 않도록 해서 우리들의 눈에 덜어오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先祖께서 여러 代 쌓은 蔭德으로 子孫이 끊임없이 이어저서 百代의 後에 크게 울리게한 것이 아니겠는가. 叔父께서 悲感한 나머지 檍에게 命하여 騰書하게 하였음으로 쓰기를 마치고 또 序文을 써서 다른날 出刊하기를 바라노라.
後孫 幼學 李壽檍 삼가 적는다. ...이수억(李壽檍 1613-1670), 德老 梧潭 碧珍 三嘉 桐溪門人林汝栢撰狀 有文集
* (註1) 昌一氏
始祖公의 23世孫 찰방공 이창일(李昌一,1611 ~ 1653). 科擧及第. 承文院博士. .
자(字) 융보(隆甫), 호(號)는 동곡(東谷), 광해군(光海君) 3년 신해(辛亥 1611) 3월 8일생이며,
인조(仁祖) 26년 무자(戊子 1648)에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며,
인조(仁祖) 27년 기축(己丑 1649)에 문과(文科) 정시(庭試) 을과(乙科) 2인에 급제하였다.
승문원박사, 보안찰방을 역임(歷任)중 효종(孝宗) 4년 계사(癸巳 1653) 12월 13일 임지에서 졸(卒).
거창군 동쪽 안양산 할아버지 묘 우측 신좌(辛坐)에 있고 묘갈명(墓碣銘)에 현감(縣監) 서호(徐琥)가 찬(撰).
 
3)壬辰譜跋(임진보 발)
벽진이씨(碧珍李氏)는 대성(大姓)이다. 그 시조가 신라말엽에 일군(一郡)을 보전했고, 고려조에 들어와서는 공신의 으뜸이 됐음은 국사를 상고해 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그후 평정(平靖, 주: 이조참판 이약동)공(公)이 청백과 충직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공의 후손인 상일(尙逸,1600~1674, 경상감사, 현재 영정 있음)이 진주목사(1650~1654)가 되고, 나(주: 조시량) 또한 진주판관(晋州判官)이 되니 모두 공의 내외손(內外孫)이다.
하루는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종족의 신수(神秀)함이 요요(遙遙: 멀고 아득함)하나 오히려 상고할 보첩이 없으니, 이 어찌 흠사가 아니겠는가. 나(주: 이상일)의 종형(從兄)인 상서(尙書)공(公)이 일찍이 이 일에 뜻을 뒀으나, 직사(職事)에 심력을 기울이다보니 능히 편수하지 못하고 평소 일가자제들에게 개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일찍이 종형(從兄, 이상서)이 뜻을 이루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진실로 이 일을 주관함으로써 종형의 뜻을 조금이라도 위로하려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국은을 입어서 다행히 이 고을(주: 진주목사)을 맡게 되자 동종(同宗) 몇 사람과 더불어 보첩을 편찬하여 그대로 인쇄하게 됐으니, 종형의 평생 뜻이 오늘에야 이뤄져서 여한이 없게 됐다. 그대(주: 조시량)가 마침 이 고을에 와서 이 일을 함께 의논하게 됐으니, 이 또한 다행이다. 이 보첩의 서문을 그대에게 부탁하니 사양하지 말라”고 했다.
나(주: 조시량)는 이에 두 손을 마주잡고 말하기를 “벽진이씨가 대대로 현달한 이가 여러 사람이 있어도 이 일에 뜻을 둔 사람이 없었는 데, 당신(주: 이상일)께 이르러서 비로소 족보가 편찬됐으니, 상서(尙書)공이 아니었다면 보첩 편찬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요, 상일(尙逸)공이 아니었다면 상서공의 뜻을 이어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보첩을 이룩한 것은 상일(尙逸)공이 아니라 곧 상서(尙書)공이라 할 것이니, 대체로 이씨 가문의 복이 다하지 아니한 것이다. 후손들이 이 보첩을 보면 효제(孝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나서 그 가풍을 추락시키지 아니함이 상서(尙書)공과 같고 상일(尙逸)공과 같을 것이 틀림 없을 것이다”고 했다.
외손 통훈대부행성균관전적 조시량 근발


出處: 碧珍李氏 族譜 임진보壬辰譜


文化 委員長  儒珍 善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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