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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집(儒山集) / 朝鮮 後記 學者 유산(儒山) 이정매(李挺邁)(1701~1767)의 詩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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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덕명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5-04-0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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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집(儒山集) / 朝鮮 後記의 學者 이정매李挺邁(1701~1767)의 詩文集

시조공 26세손 이정매李挺邁은 丹嚴 閔鎮遠先生의 門下에서修業하고, 宋櫟泉, 黃江漢, 金淵湖
등과 從遊하고 지냈다.

墓誌는 曾孫 學峻이 지었고, 行狀은 門人 李度天이 지었으며
儒山 齋記는 判書 金尚集이짓고, 序文은 參判 李義綱이 지었다。
儒山额字는 參判 金萬根이 썻으며, 文集이 세상에 전해지고있다

儒山集 / 李挺邁 著
판 종: 石版本
儒山精舍 발행이고, 1956년발행.
文集은 2卷1冊(73張)이고 : 四周雙邊 半郭 19.3 x 14.7 cm, 界線이다,
10行20字 註雙行, 內向2葉花紋이다. 魚尾 ; 28.5 x 19.2 cm
序는 戊午...李義綱
跋은 丙申1956년에 7世孫 李昌基가 썻다.
소장기관은 국립중앙도서관, 용인대학교 중앙도서관, 원광대학교 도서관등에 기증되어 소장되어있다.
유산집의 目次는
表紙 = 0
敍傳 = 1
目錄 = 6
卷之一(詩) = 23
卷之二(書) = 87
跋 = 145
內容은
2卷 1冊. 석인본. 1956년 7세손 창기가 편집, 간행하였다.

卷頭에 이의강 李義綱 의 서전이 있고, 卷末에 창기의 지문이 있다. 벽진이씨 대종회에 있다.
卷1은 詩 140首, 부록에 제인창수운(諸人唱酬韻) 32首

卷2는 書 10편, 부록으로 내서첩 來書帖 이라는 제목 아래 書 2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詩는 소박하면서도 청절하며, 때로는 철학적인 의의를 내포하고 때로는 한가롭고 탈속한 선경을 노래하여 고상한 취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유원학동(遊猿鶴洞)」에서는 절경 가운데 미몽의 세계에 도취된 신선의 꿈을 그리고 있으며, 「야인행(野人行)」에서는 농업을 천부의 낙으로 삼아 생활하는 순수한 인간성을 묘사하였다.
書중에는  민진원(閔鎭遠)에게 보낸 「상단암민상국진원(上丹巖閔相國鎭遠)」에는 학문연구에 대한 의견을 비롯하여 정치·시사 등 단편적인 문제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정치란 인(仁)의 도로써 시행하여야만 민심이 복종하고 그 결과로 태평의 덕치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창의격문(倡義檄文)」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의병을 모집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이밖에 향약에 관한 글인 「향약보장(鄕約報狀)」과 「향약절목」이 있다.


거창부 여지승람에 영조36년 1760년에 거창부사 박종익이 유생 이정매 등으로 하여금 거창지도를 만들게했다는 내용이 있다.
1765년에는 촉성루의 삼장사관련, 송암 이로의 증시를 청원을하는 내용으로, 경상도 유생들과함께 경상도 관찰사 순상국에게 상서문을 올리기도했다.
조선후기 성리학 대가인 화서 이항로선생은 1862년에 유산 이정매의 증손인 일하정 이학준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유산공은 태극론과 경학으로의 학문과 덕망이 높아, 후세에 반드시 가문의 발전이 있다고 했다.
또한 1865년에는, 화서 이항로는 일하정 이학준에게, 일하정호와 일하정기를 기술하면서, 유산 이정매 가문의 이학준에게 글을 지어준다 라고 적었다.
거창군지 기록에 의하면 유산공은 노년에 박유산 끝자락 동유골 마을에 유산재 유산정열을 지어 학문을 하면서 보냈으나 지금은 소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당시 재실 현판이었던 유산정숙 현판은 현손 7세손 동강 이창기 가문에 전해지고 있다.
과거 유산재 자리에는 가조입향조 통덕량 이난서 재실인 경모재가 세워져있다.
경모재기에 옛 유산재 자리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유산(儒山) 휘 정매(挺邁)

자는 이진(而進)、벽진장군의 26세손이고 평정공 약동(約東)의 9세 손이다。숙종 신사(肅宗辛巳 :1701)년에 태어나 민단암(閔丹巖) 진원(鎭遠)에게 수학하였다.

공은 일찍이 부친의 명을 받들고 뜻을 굽혀 과거를 보아 열 번 과거에 올랐고 네 번이나 동당(東堂 : 湖堂)에 올랐다.
무신(一七二八)년의 역적(逆賊 : 李麟佐)의 변에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檄文)을 써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뜻을 밝혀 역적을 무찌른 후에 겸손하며 그의 공이라고 자처하지 않았다.
양친(兩親)이 세상을 떠나시자, 초종(初終)이나 장례와 제사를 한결같이 자양부 자(紫陽夫子 : 朱子)의 예제(禮制)를 준수하였고, 양친의 묘소에 성묘와 참배를 아 무리 매서운 추위나 더위와 비가 내려도 노년에 이르도록 폐지하지 않았다.
반관(泮館 : 成均館)에 머물며 몸을 행동함이 한결같이 바름에서 나오니、상국 (相國 : 정승)인 김양택(金陽澤) 이 능(陵)의 참봉으로서 천거하고자 하기에, 공이 비웃으며 말씀하기를『내가 과거로서 입신양명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재랑(齋郞: 參奉)을 받는다면 다만 나의 임금과 아버지만을 속일 뿐 아니라 또한 노(魯)나라 계씨(季氏)의 염구(舟求)가 되지 못하는데 어찌 자질구레하게 등용되랴! 라고 하시고는 드디어 물러나 유산(儒山)에 살면서 노년을 마치셨다. 민단암공(閔丹巖公)을 따르며 학문하여 성리학(性理學)과 태극도설(太極圖說) 을 강론하며 많은 추허(推許)함을 받았고, 민응수(閔應洙) 와 이재(李符)와 유척기(兪拓基)와 민백상(閔百祥)과 김원행(金元行)과 송명흠(宋明欽)과 김창 집(金昌集) 등 제공들과 더불어 혹은 같이 공부를 하기도 하고 혹은 교유하기도 하면서 도의를 강마하니、 모두가 남주(南州)의 고사(高士)로 허용하였다.

(觀察使 인 李義綱이 지은 文集의 序文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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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김양택(金陽澤) : 조선의 문신(文臣).자는 사서(士舒)、호는 건암(健庵)、 본관은 광산(光 山)′ 영의정(領議政)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올랐고, 시호는 문간(文簡).
2염구(舟求) :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자는 자유(子有), 공자의 제자로서 성품이 겸손하고 재예(才藝)가 있었으며, 계씨(季氏)에게 벼슬하여 재상(宰相)이 됨.
3단암(丹巖) : 조선의 문신(文臣)이며 노론(老論)의 영수(領首)였던 민진원(閔鎭遠)의 호。 자는 성유(聖猷)요.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임.
4김민수(閔應洙) : 조선의 문신(文臣).  자는 성보(聲甫)요, 호는 오헌(梧軒)이며, 본관은 여흥이요, 시호는 문헌공(文憲公)임.
5이재(李梓) : 조선의 문신(文臣). 자는 희경(熙卿)、호는 도암(陶庵)이요、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임.
6유척기(兪拓基) : 조선의 문신(文臣).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요 본관은 기계(杞溪)며, 시호는 문공(文翼公)임.
7 민백상(閔百祥) ; 조선의 문신(文臣). 자는 이지履之. 본관은 여흥이며 시호는 정헌공(正獻公)임.
8김원행(金元行) : 조선의 문신(文臣).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美湖)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
9송명흠(宋明欽) . 조선의 학자, 자는 회가(晦可)요, 호는역천(樂泉)이며、본관은 은진(恩津)이요, 시호는 문원공(文元公).
10김창집(金昌集) : 조선의 문신(文臣), 자는 여성(汝成)이요. 호는 몽와(夢窩)며, 본관은 안동(安東)이요, 시호는 충헌공(忠獻公).

出處: 유산집(儒山集) 文獻


文化 委員長  儒珍 善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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