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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정집(一何亭集) / 朝鮮 後記 學者 일하정(一何亭) 이학준(李學峻)(1798~1870)文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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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덕명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5-04-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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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정집(一何亭集) 文獻 / 朝鮮 後記 學者  일하정一何亭    이학준(李學峻)(1798~1870)文集

1956년 현손 창기가 편집, 간행.  4권 1책. 석인본.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
一何亭集.  卷1-4  / 李學峻(朝鮮) 著, 石版本
4卷1冊 : 四周雙邊 半郭 19.6 x 14.7 cm, 有界, 10行24字 註雙行, 上下向2葉花紋魚尾 ; 28.3 x 19.5 cm
序: 丙申(1956)暮春...族曾孫[李]愚亨謹敍
跋: 丙申(1956)端陽節咸從魚命德謹識,
丙申(1956)流頭節慶州崔源謹述, 中元丙申(1956)秋七月旣望曾孫[李]愚甲謹識
소장기관 :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원광대학교 도서관전주대학교 중앙도서관
4권 1책. 석인본. 1956년 현손 창기(昌基)가 편집, 간행하였다.
卷頭에 권용현(權龍鉉)과 족증손 우향(愚享) 등의 서문이 있고,
卷末에 어명덕(魚命德)· 최원(崔源)과 증손 우갑(愚甲) 등의 발문이 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卷1은 시(詩) 159首,
卷2은 서(書) 37편과 문목(問目),
卷3은 서(序) 7편, 기(記) 11편, 上樑文 2편, 祭文 6편,
卷4는 墓誌 7편, 墓碣銘 3편, 行狀 4편, 事蹟 2편, 附錄으로 기· 만사· 행장· 묘갈명· 차운시(次韻詩) 등이 수록되어 있다.
詩에는 홍석주(洪奭周)· 홍재철(洪在喆)· 이항로(李恒老) 등에게 보낸 증여시(贈與詩), 김경선(金景善)· 김수근(金洙根) 등에게 준 송별시(送別詩), 그리고 시대적 현실이 강하게 투영된 「억적성(憶赤城)」· 「탄적상산성황폐난지(歎赤裳山城荒廢難支)」· 「문열읍수령다위민소축(聞列邑守令多爲民所逐)」 등이 있다.
서(書) 중에는  「상용전송선생문목(上龍田宋先生問目)」은 송내희(宋來熙)에게 생부모와 양부모의 상(喪)에 상기(喪期)와 복제(服制)에 대하여 질문한 내용이다.
「상이순상(上李巡相)」은 이기연(李紀淵)에게 보낸 것으로, 그가 살던 고을의 애로사항을 폭넓게 적고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의사용암진공행장(義士龍庵陳公行狀)」은 임진왜란 때의 의사 진우창(陳遇昌)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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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공 29세손  일하정(一何亭) 諱 학준(學俊)(1798~1870)                                            

평정공(平靖公) 약동(約東)의 12세손

묘 합천 숭산면 황령촌 약산.
여러번 도추에 올랐는데 천거의 요지에
경학에 침잠함은 왕이 못속에 있는것과 같다 하고,임하에서 독서를 하고,안빈낙도 하였다.
일하정기는 화서이항로선생이 지었고. 행장은 족승손 우형이짓고. 갈명은 산화 권용현이지었다.
일하정문집이있다.

17대조 평정공 노촌 이약동의 노촌실기에 편찬 간행에참여함.

18대조 합천 판서공(승원) 재실 영모재실을 창건하고 신창기를 남김

직장공 27대 거유 애국지사 화서 이항로선생이  일하정(一何亭)호號 와 일하정기 (一何亭記)짓고,

혈족으로서의 애정 어린 인연을 갖고 있으며, 일하정 문집과 화서 문집에 두 선조의 오고간 서신이 수록되어 전하고있다.                                                         

碧珍李氏 文獻錄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潁敏)하여 말을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이 많았다. 자라서는 금곡(錦谷) 송선생(宋先生)의 중용강론(中庸講論)을 들었는데 금곡(錦谷)이 여러번 칭찬하여 말씀하기를 『내가 이 모(李某)에게 처음으로 중용(中庸)의 심오(深奧)한 뜻을 들었다』하고 또 홍매산(洪梅山)과 이화서(李華西) 제현을 좇아 교유(交遊)하였는데 다들 장려(獎勵)하고 칭예(稱譽)하여 허교(許交)하였다. 간혹 일찍이 과시(科試)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거연(居然)히 대수롭 지 않게 생각하고 별로 좋아하는 바가 아니었다. 다만 어진 경재(卿宰 : 공경사대부(公卿士大夫))들과 사귀는 인연이 되어 선현(先賢)과 조선(祖先)의 미적(美蹟)을 강론하고 포장(褒章)함으로 모든 공(公卿)들이 몸을 낮 추어 굽히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살고있는 고을에 용호원(龍湖院)이 있으니 동계(桐溪) 정온선생(鄭蘊先生)을 제사하는 곳으로서 공(公)이 일찍부터 힘을 다하여 관리경영(管理 經營)하고 그 원(院)에 주강(主講)이 되어 엄숙한 규약으로 여러 학생을 창도(唱導)하고 인솔하여 유풍(儒風)을 진흥케 하니 향중(鄕中)이 공을 의뢰(依賴)하였다. 항상 고상한 풍채를 가져 연연(戀戀)하여 머뭇거리고 아첨하는 태도 (態度)가 없으므로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그때 청고(淸高)를 지키고 자처 (自處)하는 몇 분의 인사(人士)도 반드시 공(公)으로 수반(首班)을 삼았다.일찍이 경학(經學)과 유행(儒行)으로 향천(鄕薦)과 도천(道薦) 그리고 수의어사(繡衣御使)의 천거(薦擧)가 여러번 있었으되 마침내 처사(處 士)로 돌아가셨으니 공의(公議)는 애석해 하지마는 공의 심사(心思)는 어찌 손상함이 있었으리오. 

화산(花山 : 세칭유종(世稱儒宗)) 권용현(權龍鉉)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에서 

공이 여덟살때 어른들이 조선(朝鮮)으로 제목(題目)하여 시(詩)를 지으라 명령하니, 문득 지어 말하기를 『일월(日月)의 밝은 빛이여 아침마다 거듭되도다』하니 좌중(座中)이 다 경탄하였다. 이로써 공의 재지(才智) 가 뛰어났음을 볼 수 있을 것이오. 일찍이 학덕이 높은 선생의 문하(門 下)에 경례(敬禮)를 갖추고 명현(名賢)과 공명(公卿)의 반열(班列)에 종유 (從遊)하였으니,  용전(龍田) 송내희(宋來熙) 제주(祭酒)께서 추증(推重)하여 허교(許交)하시고 말하기를 『독서(讀書)한지 四十년만에 들어보지 못한 중용(中庸)의 심오한 뜻을 처사(處士) 이모(李某)는 의문나고 어려운 것을 해부하여 풀어주니 진실로 경학(經學)의 유사(儒士)로다.  사람들이 묻지 않은 바를 물었다』하고 홍매산(洪梅山) 직필(直弼)은 『이모(李某) 는 단아(端雅)한 선비로 더욱이 선현(先賢)을 포미(褒美)하는데 부지런 하다』고 말씀하셨으며, 종중(宗中)의 어른이신 화서 항로(華西 恒老)께서 일하정기문(一何亭記文)을 지어 말씀하시기를 『유행(儒行)은 도(道)에 근접(近接)하고 곤궁(困窮)을 겪어도 안연(晏然)히 처신함이 옛날의 현 인들도 이에 지나치지 못할 것이라 하였다.
본(本)고을 부사(府使)인 매곡(梅谷) 송계수공(宋啓洙公)도 말씀하기를 『이모(李某)의 말은 아름답기가 문장고 시율(詩律)같아 시(詩)로 꾸민 것이 아니로되 자연히 우러나는 음성이라 일렀더라. 관부(官府)에서 천거(薦擧)한 요지는 명문세족(名門世族)으로 유행이 있고 타고난 성(郭 性)이 효우(孝友)하다』고 하였고 도(道)에서 천거(薦擧)한 요지(要旨)는 『경학(經學)에 침잠(沈潛)하여 주옥(珠玉)이 못물에 잠겨있는 것 같다』고 하였으며 비단옷 입은 암행어사(暗行御使)도 임하(林下 • 자연(自然))에서 독서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유사(儒士)라는 요지로 공을 천거(薦擧)하였었다.
공의 학문과 행의가 실질적이고 깊이 감추어진 포부가 중후함이 이와 같음에도 마침내 당세에 대우받은 바가 없이 불운(不運)하여 곤궁하게 사시다가 세상에서 돌아가시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으랴。
족증손(族曾孫) 우형愚亨이 지은 행장에서..


出處: 一何亭集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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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化委員長  儒珍 善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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