畏齋集..이후경(李厚慶, 1558~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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畏齋集 序
畏齋先生逸稿 序[ 李光庭 ]
三代敎人爲學之道。見於戴記大學篇。而若小學則朱夫子采摭遺法之散出於傳記者。兼取古今嘉言
善行以實之。雖曰小子之學。而大學之道。固已畢具於其中。爲學而不本諸此以書。非孔氏之道也。我東性理之學。肇自圃老先生。而寒
暄堂金先生實承其緖。暄翁平日。以小學律身。晩年猶自稱小學童子。靜庵先生從暄翁學。其得君爲治。專以是書爲敎。退翁先生亦
言頼靜庵讀小學書。其遊郡庠。人問以曾讀小學云。則先生少日言動。已是小學規矩。可知也。寒岡先生。卽暄翁之外孫。實傳暄翁家法。
而又嘗從退翁門庭。師受孔門旨訣。其平日敎人自爲。不出是書之法度。論者以 岡翁。比孔門之曾氏。以其學專用心於內也。李畏齋
先生與兄子復齋公。從岡老遊四十餘年。言未嘗不言先生之言。行未嘗不行先生之行。深思力覃。不得不措。蓋於書無不辨問。於理
無不講究。而其立心行己。日慥慥焉者。又不出是書之中。故能薰陶矯揉。一變幼少芬華之習。而味澹泊喜淸素。隨位而行。憂患困阨。不
能以易其守。超然自得於名利之外。而非禮者不敢近。蓋其道於君親,兄弟,師友,閨門,州閭之間。無不隨遇而各求其則。上䅲古君子之行。其
不合者寡矣。若先生。可謂眞讀小學者矣。世之學者。處下窺高。身不離卑近之塗。而捏取游夏之所未紋聞者。巧好其文辭。以自托於不朽
之業。而却咲躬行之君子。以爲庸陳無足取。其亦不知也已。先生嘗以疑禮。講質師門。爲書二卷。又嘗有所論著。皆有益世敎者。而吿
之回祿之災。今其存者。寒岡先生言行錄,年譜及 郭禮谷行狀,朴大庵言行錄等篇。酬唱詩什書表雜著若干首。爲可惜也
然先生之學。得之寒岡而二賢之與先生。大致略同。則其所論撰。而先生之所造可知。亦無待乎他也。復齋遺文。又加少。先生之胤益庵翁
遺稿。所餘無多。不可分爲別稿。倘編之先生逸稿之後。使後之學者。知先生家學之盛。恐或未失也。不佞老廢無識。先生後孫基遠等。以
葛庵李先生狀。索墓道記。因請所以弁卷首者。非不侫所敢任也。顧平一願爲先生執鞭而不得者。不敢固辭謹書平生所感慨者如此。爲畏齋先生逸稿序。
上之二十年甲子十月戊午。後學平原李光庭謹書
畏齋先生世系圖
畏齋先生年譜
畏齋先生文集卷之一
詩
書
祭文
畏齋先生文集卷之二
行狀
畏齋先生文集卷之三
行狀
墓表
畏齋先生文集 卷之四
附錄
내용 개요
畏齋先生逸稿序(15)
李光庭(1674-1756)이 지었는데, 끝에 “上之二十年甲子十月戊子 後學平原李光庭謹書”라고 되어 있어, 서문을 쓴 해가 1744년임을 알 수 있다.
畏齋先生世系圖(24)
이 세계도는 신라 말 고려 태조와 글을 주고받아 金石之交를 맺은 碧珍郡을 맡고 있던 李忩言이 벽진이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30세까지의 가계를 기록하고 있는데, 저자는 시조로부터 21세손이다. 이 책을 간행한 이혼연·이욱연은 25세손이다.
畏齋先生年譜(18)
이후경의 생애를 매우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저자가 누구인지는 자세치 않다.
畏齋先生文集目錄(6)
이 문집은 특이하게도 목록 앞의 서문, 세계도, 연보, 그리고 목록까지도 판심에 ‘卷一’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어서 권1에 詩·書·祭文을, 권2에는 저자가 지은 行狀을, 권3에는 저자가 지은 행장과 묘표를, 권4는 부록으로 저자에 대한 기록들을 수록하고 있다.
【권 1】
詩(9)
형식 구분 없이 15제 17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이 挽詞이다. 지은 해는 괄호 속에 표기하였다. 題堂前四季花(1629), 寒岡先生溫井浴行時至斗巖與陪行門徒舟中和韻相和(1617), 贈別黃東萊汝一(1617), 挽朴大庵惺, 挽安磊谷克家, 挽郭德修永禧(2수), 挽朴鶴巖廷璠(2수), 挽盧梅竹窩克誠, 挽益巖, 挽寒岡鄭先生(1620), 挽郭忘憂再祐, 挽許察訪洪材, 挽宋亞軒遠器, 寒岡先生往晴暉堂以日用無餘功相看俱努力命門下士分韻得努字(1590), 題玉川溪亭.
書
上寒岡先生問目十一條(5)
이 글은 한강 정구에게 예의 절목에 대해 11조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을 항목별로 나누어 기록한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妻家에서 부친상을 당했을 때, 그 어미의 忌祭를 葬禮 전에 당할 경우 달을 넘겨 다른 곳에서 지내면 어떠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한강은 “大喪을 당하여 장사하기 전에는 기제를 지내기가 어려우나, 혹 복을 입지 않거나 가벼운 복을 입는 자가 임의로 다른 곳에서 지낸다면 거리낌이 없을 것이다.”라는 내용과 같은 것들이다.
答孫景徵起陽書(1)
이 편지는 1616년 孫起陽(1559-1617)의 글에 답한 것이다. 자신은 영주 부석사에 한강선생의 문병을 와 3일을 머물렀는데, 선생이 목욕 후 손가락이 조금 펴지고 식사가 전보다 나아졌으며, 장거리 여행에 새로운 병을 더하지 않았다. 봉화의 名醫 李君哵이 와서 침을 놓았는데, 이로부터 점차 평상시와 같이 회복되어 기쁘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與趙任道書(1)
이 편지글은 1626년 澗松 趙任道(1585- 1664)에게 보낸 것이다. 이제 冠禮를 치른 둘째 아들과 長孫이 함께 공부하는데, 큰 아들이 서울로 가면서 장손의 공부를 부탁하였다고 하니, 둘째 아들도 같이 가르쳐주길 청한다는 내용이다.
與辛萬戶(1)
이 편지는 1617년 동래의 辛 萬戶에게 보낸 것으로, 한강선생이 동래 온천에 목욕하러 갔을 때 쓴 것이다. 선생의 중풍 증세에는 오소리 가죽이 좋다고 하니 그것을 사서 이부자리를 만들어 쓰려 한다. 쌀 1석을 대금으로 보내니 바꾸어 보내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祭文
祭寒岡先生移殯時文(1)
한강 정구에게 제사를 지낸 제문이다. 玉色이 이미 멀어지고 金聲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은 일찍 문하에서 교육을 받아 은혜와 의리가 무거움을 말하고 있다.
祭寒岡先生葬時文(4)
한강 정구의 장례 때의 제문이다. 선생이 돌아가시니 聖學은 이미 멀어지고 큰 도는 어둡고 막혔다. 자질은 본래 고명하고 도량은 넓고 컸다. 처음에는 德溪 吳健에게서 배웠고, 퇴계선생에게서 心學을 질의하여 도를 구함이 더욱 간절하였고, 남명선생에게서 배워 壁立千仞의 기상을 景仰하고 惺惺함을 계승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한강의 업적을 약술하였다. 끝부분에는 자신과의 관계와 은혜의 무거움을 토로하면서, 만사가 이미 끝났으니 업을 마칠 길이 없고, 길게 울부짖어도 미치지 못하니, 누가 나의 슬픔을 알겠는가라고 하면서 잔을 올린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祭朴大庵文(2)
大庵 朴惺에게 제사를 지낸 제문이다. 精金·美玉의 자질과 孝悌·忠信의 行은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나와는 도의의 사귐을 맺어 서로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시를 지어 보내자 서문을 지어 나에게 준 일이 永訣하는 일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라고 하면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再祭文(2)
대암 박성에게 제사지낸 두 번째 제문이다. 대암 박성의 인품이 빼어나고, 몸가짐은 雪氷과 같고, 뜻의 견고함은 金石과 같으며, 窮理에 힘쓰고 敬義를 몸소 실천하였다고 서두를 시작하였다. 중간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한 시도 잊지 않았음을 말하고, 병에 걸려 죽게 된 것을 통석해 하고 있다.
祭郭忘憂文(1)
망우당 곽제우에게 제사지낸 제문이다. 먼저 뛰어난 자질을 타고나서 효제충신을 행하면서 입신양명의 뜻을 가지고도 반평생을 전원에서 보내다가, 왜구의 침입을 당하여 倡義하여 가산을 다 쏟아 강우지역을 병화에서 구한 공이 지대함을 논했다. 이어 조정의 은총이 내렸으나 부귀에 뜻을 두지 않고 강호에 집을 짓고 빛을 감추고 자취를 흐리게 하다가, 병에 걸려 이 지경이 되었음을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과는 종유한 지 오래되어 정의가 돈독하므로 슬퍼하는 심정이 더하다고 하였다.
祭朴鶴巖文(1)
鶴巖 朴廷璠(1550-1611)에게 제사지낸 제문이다. 학암의 인품이 뛰어남은 鄕中에서 이론이 없다고 하며, 예전에 자기와 서울에 유람하기로 약속했는데 지금 무덤 속에 있으니 애통하다는 말로 영결을 고하는 내용이다.
祭郭德修文(2)
예곡 곽율의 아들이며 저자의 처남인 晩翠堂 郭永禧에게 제사지낸 제문으로 1619년에 쓴 것이다.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 난 사람으로 물욕에 담백하고 가난을 달게 여기며, 뜻은 도를 구함에 두었고 마음은 외물에 끌림을 끊었는데, 난리가 일어나 전투에 참여해서 고립된 성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두 아들과 함께 죽었다. 이 一門의 충효는 만고에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香火를 올릴 후사가 없으니, 누구에게 감회를 의탁할까 하는 내용이다.
祭郭存齋䞭文(2)
存齋 郭䞭의 大祥 때 올린 제문으로 1600년에 지은 것이다. 훌륭한 성품을 타고나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정유재란 때 종군하다가 자신과 두 아들이 전사하고, 딸 하나는 자결하였으니 一門의 충효가 만고에 전해질 것이라 하면서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작자와는 근원이 같고 道契도 같아 형제처럼 지내면서 서로 연마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祭郭君履常履厚兄弟文(1)
곽 이상·곽 이후 형제에게 제사지낸 제문이다. 두 형제가 전쟁에서 끝까지 헤어지지 않고 함께 적에게 죽임을 당한 충효정절을 기려 잔을 드리면서 지은 제문이다.
祭鄭景緝惟凞文(1)
1620년에 정유희에게 제사지낸 제문이다. 자질이 빼어난 인물이 일찍 죽었음을 애석해 하고 있다. 동문수학한 벗으로 저자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祭伯兄德巖公文(2)
伯兄 李碩慶에게 제사를 지낸 제문으로 1628년에 쓴 것이다. 86세에 돌아갔고, 內外의 여러 손자가 57명으로 오복을 갖추었다고 했다. 동생으로서 영결하지 못하고, 병환에 약을 드리지 못했고,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음을 한탄하고 있다.
【권 2】
行狀
有明朝鮮國通訓大夫禮賓寺副正禮谷先生郭公行狀(14)
저자의 장인인 예곡 곽율의 행장이다. 곽율은 1531년에 태어나 1558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남명선생을 배알하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한강선생에게 의문을 질의하였다. 洛川 裵紳, 雪月堂 金富倫, 동강 김우옹, 대암 박성 등과 절친하였고, 存齋 郭䞭은 나이가 적었으나 마음으로 교분을 맺고 한 동리에 거주하였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로 造紙署 別提에 제수된 것으로부터 1586년에 鴻山縣監으로 재직하면서 치적을 쌓아 군자감 판관, 예천군수로 승차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 金誠一에 의해 草溪假郡守가 되었다가 곧 초계군수가 되었다. 이후 왜군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했으며, 향년 63세로 館舍에서 졸한 사실과 묘소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다.
大庵朴公言行錄(15)
대암 박성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다. 언행록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행장과 비슷한 문체로 기록하였다. 대암은 1549년에 현풍 率禮洞에서 태어났다. 9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1567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577년 모친상을 당했다. 1582년부터 여러 차례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가, 1591년에 비로소 나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유사를 도왔다. 그 공으로 공조정랑에 올랐다. 다음 해 안음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칭해 벼슬을 버리고서 청송 古松村에 자리를 잡았다. 향년 58세로 졸하였다.
聚遠堂曺公行狀(6)
취원당 曺光益(1537-1578)의 행장으로,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그의 자는 可晦, 호는 竹窩이다. 그는 1537년에 창원에서 태어났다. 13세에 퇴계선생을 찾아가 『심경』을 배우고자 하니, 선생이 차례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소학』을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숙독했다고 하여, 시험해 보니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1558년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1564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576년 重試에 급제하여 文名을 떨쳤다. 아우 芝山 曺好益(1545-1609)이 崔滉의 모함에 빠져 江東으로 유배되자, 平安都事를 자청하여 부임해 회포를 나누면서 痛飮하다가 병을 얻어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임지에서 졸하였다. 宣祖가 조광익의 효행을 듣고 정려를 명하고, 『三綱行實圖』에 기록하게 하였다.
【권 3】
行狀
有明朝鮮國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世子輔養官寒岡鄭先生言行錄(51)
한강 정구의 언행록인데, 행장과 비슷한 문체로 기록하였다. 한강의 언행은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뒤에 나오는 연보에 다시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寒岡鄭先生年譜(20)
연보에 실린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1543년 성주 南山里 柳村에서 태어났다. 9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16세에 先聖의 화상을 그려 아침마다 參謁하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이 해 德溪 吳健에게 배웠다. 21세 때 퇴계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을 공부하였다. 겨울에 광주이씨에게 장가들었다. 24세 봄 남명선생을 배알하였다. 26세에 川谷書院을 창건하여 伊川과 朱子를 봉안하였다. 11월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31세에 禮賓寺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3세에 建元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36세에 6품직에 서용되어 司圃署 司圃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렸고, 가을에 義興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宗簿寺 主簿와 三嘉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37세에 『大學問答』을 완성하고, 가을에는 『伽倻遊山錄』을 완성하였다. 38세에 창녕현감에 제수되어 사임해도 윤허되지 않자, 4월에 부임하였고 그때 『昌山志』를 완성하였다. 41세 때 會淵으로 이거하고 초당을 지었다. 호조정랑 등의 벼슬이 내렸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44세에 함안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하였고 이듬 해 『咸州志』를 완성하였다.
47세 때 문도들을 이끌고 『심경』을 통독하였고, 48세 때 『근사록』을 강하였다. 49세 때 통천군수에 제수되어 1592년에 부임하였다.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51세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강릉부사에 부임하였다. 52세에 同副承旨, 53세에 右副承旨, 54세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55세에 성천부사로 부임하였다. 58세 때 『古今忠謨中和集說』·『古文會粹』·『聖賢風範』 등을 완성하였다. 59세에 『心經發揮』를 완성하였고, 60세에 충주목사에 부임하였다. 61세에는 『五先生禮說』을 완성하였고, 62세 때 武屹山齋를 짓고, 『洙泗言仁錄』을 완성했다. 63세에 『臥龍巖誌』를 완성하였고, 회연초당을 중수했다. 64세 12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자, 이듬해 정월 부임하여 廬江書院을 중창하여 퇴계선생을 봉안하였다.
72세 때 초당에 불이 나 1백여 권의 저술과 서책 수천여 권이 불에 타고, 오직 『심경발휘』만 화를 면했다. 73세에 학봉 김성일의 행장을 지었다. 74세에 영천의 숙정 온천에 갔다가 부석사에 머물렀다. 75세에 동래 온정에서 목욕했다. 『五服沿革圖』를 완성했다. 78세 정월 5일에 持敬齋에서 考終하였다.
墓表
先考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行折衝將軍龍驤衛副護軍府君先妣貞夫人密陽朴氏合祔墓表(4)
이 묘표는 저자의 모친이 별세한 지 64년, 부친이 별세한 지 24년만에 두 분의 묘를 合祔하면서 비석을 세우는 감회를 기술한 것이다. 뒤에는 집안의 내력을 서술하고 양친의 생몰년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두 분의 추증된 벼슬을 드리게 됨을 말하고 있다. 이 글은 1629년에 지어진 것이다.
【권 4】
附錄
挽(2)
여기에는 이후경이 별세하였을 때 지인들이 지은 만사를 모아 놓은 것인데, 石潭 李潤雨, 澗松 趙任道, 兪亨吉의 만사가 수록되어 있다.
行狀
有明朝鮮國贈通政大夫兵曹參議行通訓大夫陰城縣監畏齋李先生行狀(16)
이 행장은 1700년 葛菴 李玄逸(1627- 1704)이 지었다.
祭文(5)
이후경에게 올린 제문을 모은 것으로, 지은이는 趙任道, 從子 李道孜, 門人 李涑, 從孫 李潝 등 네 사람이다.
祭墓道文(1)
이 제문은 權斗經(1654-1726)이 지었다.
碣銘
贈通政大夫兵曹參議行通訓大夫陰城縣監畏齋李先生墓碣銘幷序(7)
이 묘갈명은 李光庭(1674-1756)이 지었다.
德峯書院奉安文(1)
이는 權斗經이 지은 것으로, 덕봉서원에 이후경을 봉안할 때의 봉안문이다.
常享祝文
이는 趙任道가 지은 것으로, 덕봉서원의 향사 때 쓰는 상향축문이다.
常享祝文
이는 郭壽龜가 지은 것으로, 덕봉서원 향사 때의 상향축문이다.
德峯書院上樑文(3)
이는 洗馬 辛夢參(1608-?)이 지은 것으로, 덕봉서원을 창건할 때의 상량문이다.
德峯書院重修上樑文(4)
이는 高裕(1722-1779)가 지은 것으로, 덕봉서원을 중수할 때의 상량문이다.
跋(3)
이는 1709년에 郭壽龜가 지었다.
跋(2)
이는 1744년에 權萬이 지었다.
이 아래에 『益庵先生遺稿』(33면)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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