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영(李彦英, 1568년 ~ 16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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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영(李彦英, 1568년 ~ 1639년) :
조선조 인조때의 명신으로 자(字)는 군현(君顯),호 (號)는 완석정(浣石亭)으로 의리가 아니면 한올의 털이라도 취하지 않았던 절의지사(節義志士)로서 1568년 2월 18일 축시(丑時)에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서 태어났다. 공(公)은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의 21세손(世孫)으로 고조(高祖) 유강(惟 康: 通仕郞), 증조(曾祖) 인손(麟孫: 成均進士), 조부(祖父) 운(運: 顯陵參奉), 그리고 좌랑(佐郞) 등림 (鄧林)의 아들로 출생 하였다. 공(公)의 가계는 고려시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명문가이다. 공(公)의 10대조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선생은 고려초의 충열 충선 충숙 3대를 거친 명신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시와 문장으로 원(元)의 황제를 감복시킨 기록등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또 공(公)의 아버지 공암(孔巖) 이등림(李鄧林)선생도 대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인동부사등을 역 임한 청백리로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만인의 사표(師表)가 된 분이다. 청렴결백한 몸가짐으로 선정을 배푼 공암공(孔巖公)의 덕을 글로 새긴 괘혜암(掛鞋巖)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괘혜암은 지방문화제 제184호로 지정되어 1980년에 구미시 인의동 374-5 삼거리로 이전하여 현재 시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청백공무원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언영(李彦英)公이 나이 20세가 되어 보다 참된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을 찾아 갔는데 한강(寒岡)은「요사이 젊은 사람중에서 마음갖임이 확연하고 자질이 굳건한 사람이 흔치 않은데 이제 그대를 보니 이와 같으니 후일 크게 성공 하리라」했다. 한편 이언영(李彦英)公을 맞이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은「이 사람은 가정교육을 참으로 잘 받았기 때문에 뒷날 집안을 빛낼 재목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예들은 공(公)의 가통(家統)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대에 걸쳐 학문을 숭상하고 사대부가 제일중요시 여기는 충효(忠孝)와 청렴(淸廉) 결백(潔白)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좋은 토양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公)은 당대의 으뜸가는 석학(碩學)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 양(兩)선생을 동시에 사사했고 여기에 공(公)의 총명마져 가미되어 그 역시 훌륭한 학자가 되어 후진의 사표가 되었다. 1575년(선조 8년) 공(公)의 나이 8살 때 교수(敎授)직으로 있는 아버지 공암공(孔巖公)를 따라 전라도 남원(南原)향교를 방문한즉이 있었다. 이때 공암공이 석전제를 드리기 위하여 여러 헌관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선비들에게 인사를시키려고 공(公)을 명륜당으로 불렀다. 그 때 한 헌관이 공(公)에게 장난삼아 골려줄 생각에서 모(母) 자(字)운을 붙여 글을 지어 보라고 했는데 그는 서슴지 않고 붓을 들어「望母我身 我望母:어머니가 고향에서 나를 애타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어머니를 간절히 생각한다」라는 글을지으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놀랐다. 유년기에 집자성구(集字成句)가 가능했던 공(公)은 소년시절에는 서사원(徐思遠)의 훈도를 받았고 20세가 갓넘자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정식 입문했다. 그는 정구(鄭逑)로부터 심성론과 절의학을,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심오한 우주철학을 배웠다. 1591년(선조24년) 23세때 생원(生員)이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던 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바로 귀향해서 와병중인 모부인(성씨)를 지성으로 시병간호하다가 1593년 봄에 농토를 팔아 전마(戰馬)40필(匹)을 마련하여 처 6촌이기도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공이 의령에서 창의(倡儀)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서 의병활동을 활달하게 전개 하였다. 그곳에서 공은 영남우도에서 맹열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오운(吳雲), 조종도(趙宗道), 박성(朴惺), 성안의(成安義)등 제공과 함께 토적(討賊)을 의논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1년(선조34)에 효렴(孝廉)의 천(薦)으로 순능참봉(順陵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1603년(선조36) 10월 1일 36세의 나이로 임란(壬亂) 때문에 10년만에 처음 실시되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가문과 고장을 크게 빛나게 하였다. 이때 판서직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자네 급제가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자 그는「장원하느라 늦었습니다」로 응수하여 좌중을 한바탕 웃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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