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寅譜
페이지 정보

본문
庚寅譜序 (肅宗庚寅孝獻公設局于楊州蘆原下溪里贊成公瑩下卽庚寅五卷譜也)
경인보서 (숙종경인효헌공설국우양주노원하계이찬성공영하즉경인오권보야)
碧珍李氏譜成吾宗世 氏實幹焉頃以譜卷凡例及所製跋文投示余 序之嗟乎譜之修有三難焉胄遠世疎支派易紊則敬焉而不미昧昭穆之序一難也主張刪錄自出易詳則公焉而不間親疎之別二難也擧 力屈情志易怠則勤焉而不計歲月之久三難也自古君子多病之今觀斯譜其編철帙則先代自山花先生大將軍以下伯叔之次秩秩有序宗人咸曰敬如歐陽子其凡例則合衆族明一本釐舊闕刷新增不欲異詳略於疎戚宗人咸曰公於蘇明允其功役則經紀十數年費弊心力而鳩零 之資竟底厥成宗人咸曰勤於范希文噫不難古人所難能古人所不能使後世子孫油然生孝悌之心者非斯譜也歟若其完事始末在跋文甚詳而其共勉世德之語尤有感焉世所奕然稱名家者非獨以門右而族甲也謂其行誼可法而禮敎不替也凡我宗人咸 焉仰遵先懿庸貽後嗣則吾卜吾宗子弟且蒸蒸奮起不可量也於是乎色沾沾喜曰有味哉斯言也達爲譜之義矣能無難敬公勤三字有以也第念宗族之居嶺外者道里云遠事故多端勤勞旣孤於幹事財力又綿於助工徒然仰成而稱美者有若 家事是以臨文 嘆而無以解也歲在庚寅閏秋後孫奉正大夫前行司憲府持平柱天謹序
⊙庚寅譜序 譯文(肅宗三十六年 1710年 閏秋)
경인보서 역문(숙종삼십육년 1710연윤추)
碧珍李氏 譜冊의 完成은 우리 宗親 世 氏가 實際로 맡아서 한 것이다. 近間에 譜卷의 凡例와 지은 跋文을 나에게 보이면서 序文을 써 달라고 하였다.
아 ! 族譜를 編修하는데는 세가지 어려움이 있으니 子孫이 윗 代로부터 멀어지고 世代가 疏遠해저서 支派가 어지러워지기 쉬우머로 경건이 昭穆의 차례를 애매하지 않게 하는 것이 첫째 어려움이요, 刪削과 記錄을 主張하면서 自然히 詳細하고 簡易하게 되기 쉬우므로 公平하게 親疎의 區別을 두지 않토록 하는 것이 둘째 어려움이요, 지나치게일을 始作하여 힘이 꺽이면 情熱과 意志가 怠慢하게 되기 쉬우므로 부지른이 하여 時日이 오래 걸리는 것을 해아리지 않는 것이 셋째 어려움이니 옛부터 君子들이 이를 많이 근심하였다, 이제 이 譜冊을 보니 그 編帙은 先代 山花先生과 大將軍으로부터 以下로는 伯叔의 차례가 整然함으로 宗人들이 모두 이르되 『歐陽修의 族譜처름 경건하다』 고하였다. 그 凡例는 衆族을 모아서 根本이 같음을 밝히고 옛날 빠진 것을 고처넣고 새로 더할 것을 蒐輯함에 있어서 詳略을 親疎에 따라 달리하려 하지 아니하였음어로 宗人들이 모두 이르되 『蘇洵보다 더 公正하다』 고 하였다. 그 功役은 十數年동안을 거치면서 心力을 다 기울리고 零細한 資金을 모아서 마침내 完成하였음으로 宗人들이 모두 이러되 『范仲淹보다 더 부지른했다』고 하였다.
아 ! 옛 사람이 어려워하든 바를 어렵게 여기지 아니하고 옛 사람이 못한 일을 能히 하여서 後世子孫으로 하여금 孝悌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하는 것이 바로 이 族譜가 아니 겠는가 ? 또한 이일을 마치기 까지의 始末은 跋文에 詳細히 記錄되어 있는데 그기서 『世德을 닦는데 다같이 힘쓰자』 는 말에 더욱 느낀바 있었다 『世上에서 名家라고 이러는 것은 비단 門閥이 좋고 지체가 놓은 집안인 境遇 뿐만 아니라 그 行誼가 남의 模範이 되고 禮敎가 衰退하지 아니함을 말한다 무릇 우리 宗人들은 모두 부지른히 힘써고 힘써서 先朝의 훌융한 規範을 遵守하여 이를 後孫에 물려준다면 내 생각으로는 우리 宗中 子弟들이 더욱 向上奮起함이 無限할 것이다』 고 하였드니 이에 喜色을 더하여 이르기를 『意味가 있도다 이 말씀이여 ! 族譜의 意義에 通達하였도다. 無難할수 있었든 것은 恭敬, 公正, 勤勉 等 세가지가 있었음으로서 였다』 고 하였다.
또 생각하근데 宗族의 居處가 嶺南外인 者는 길이 멀다하고 事故가 많아서 勤勞로는 이미 일을 돌보지도 못하고 財力으로도 또한 役事를 도우는데는 微弱하여 부질없이 成事되기만 기다려 稱讚이나 하여 남의 집 일같이 對하였으니 이 때문에 序文을 쓰기가 부끄럽고 恨歎스러워 解明할수도 없다.
歲在庚寅閏秋 後孫 奉正大夫 前行司憲府持平 柱天謹書
(세재경인윤추 후손 봉정대부 전행사헌 부지평 주천근서)
◎庚寅譜(乙巳改正序)
경인보(을사개정서)
我李氏新譜旣 仍 于東郊役所昨年余適 嶺藩師傳從兄謂余曰吾宗人在鄕者多於京印書之力亦近易而遠難譜板宜運置嶺中以便其廣印吾兄旣幹大事以成之又爲在鄕諸宗地如此意甚盛矣敢不惟命遂於上任之初方便輸致藏于 金陵直持寺蓋金陵卽我先祖平靖公之 社也旣而屬余以弁卷之 文禮辭而終不獲不得不忘其拙敬唯而修牒節目 凡例備焉登梓首尾跋文詳之持憲君之序又說之盡矣實無更贅之語唯以古今人論譜者觀之其曰相視如塗人其初兄弟兄弟其初一人之身一人之身分而至於塗人故譜所以作者凡修譜家之大意而古人己言之其曰 吾之身旣有父祖父祖之身又有父祖 而求之能知自吾父祖以上所父祖者則追遠敦族之心自不能己者斯言誠是矣而亦序譜者之恒譚也 顧將以何辭仰塞諸宗之所須乎然有一說可以相與共勉者夫姓氏族世似乎無與於邦國之治而成周之制司商掌受姓小史奠繫世建官設職若是其重者何也誠以天下者一國之推一國者一族之推一族者一人之推也今一人得姓而著其籍一姓成譜而紀其世使統緖明於後而流風猶存親愛及於遠而遺敎不泯以至崇德象賢無 其所生則是一人之化成於一族而一族之化成於一國自國而天下其化漸廣也然則聖王之治所以重氏族者豈但爲因流討源尋葉知根也哉惟我李氏肇閥三韓于今八百有餘年二十有七世而世以功德文章節義聞有若碧珍公當羅季塗炭之際屹然以孤城介於東南麗王不敢臣之亦不敢加兵遂令半嶺之民得免殘害爲異物而開號演食子孫仍籍焉其利澤功效之偉然豈區區汗馬於矢石間以冀尺寸者之比有若山花公以文煥猷而嗚國家之盛有若耕隱公甲戌之見幾有若琴軒公己卯之抑邪其淸名直節可以垂光於簡策有若平靖公以德望廉操恬節士林推爲領 袖至今俎豆不替有若忠肅公立 於江都有若畏齊公有若蘆坡公俱以學行名此實後承所當襲其烈繩其武岡墮於無窮者凡我一族諸君子皆以上祖之利澤及民 山花之文章耕隱琴軒之明哲卓 平靖之德行廉白恬退忠肅之節義畏 蘆坡之學行爲自己分內事交相勉勵則向所謂崇德象賢無 所生者其不在斯而亦庶幾裨益 聖朝之風化無 於古聖王重氏族之意矣豈不誠 歟晟哉諸君勉之勉之余亦平靖公之雲孫敢效公晩節方做退之一字臨行書此以歸之而牽忙不能致力於文惟覽者怒之爾崇禎甲申後八十二年乙巳仲秋下澣後孫通政大夫戶曹參議知製 敎世瑾謹序
⊙庚寅譜 己巳改正序 譯文
(경인보 기사개정서 역문)
우리 碧珍李氏의 새로운 族譜가 이미 板刻되어서 그대로 楊州譜所에 쌓아두였는데 昨年에 내가 마침 慶尙監司를 맏게되자 王子師傳인 從兄(世 )이 나에게 이르되『우리 宗人이 서울보다 鄕里에 사는 이가 더 많고 印刷하는일도 또한 가까운 곳이 쉽고 먼곳에서는 어려우니 譜板을 嶺中에 옮겨 두었다가 널리 印出하는데 便利하도록 하자』 고 하였다. 우리 兄이 임이 큰일을 맡아 이루었고 또한 鄕村에 사는 여러 宗族을 爲하는 마음이 이렇듯 懇切하니 뜻이 매우 盛大한지라 어찌 敢히 그 命令을 쫏지 아니하리오 ?
드디어 赴任初에 機會를 얻어 運搬해서 金陵直指寺에 保管해 두었으니 金陵은 곧 우리 先祖 平靖公의 鄕里이다. 얼마後에 나에게 序文을 付託하기에 辭讓하였으나 끝내 어찌할 수가 없어서 不得己 옹졸함을 잊고 경건하게 應諾하였다. 譜牒을 編修하는 節目은 凡例에 갖춰졌고 , 刊行의 始末은 跋文에 詳記 되었으며 또한 司憲府持平 柱天君의 序文에 說明을 다했으니 다시 더할말이 없다. 다만 古今의 사람들이 族譜를 論한 이를 살펴보면 그들은 이르되 『서로 보기를 남과 같이 하나 그 처음에는 兄弟요 兄弟의 처음은 한사람의 몸이니 한사람의 몸이 나누어져서 길가는 사람과 같이 됨으로 族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무릇 이것이 族譜를 編修하는 大意이다』 고 옛 사람들이 이미 말하였다. 거기에이르되 『나의 몸이 이미 父祖가 있고 父祖의 몸이 또한 그 父祖가 있어서 거슬러 올라가서 求하면 能히 나의 父祖로부터 위로 父祖되는 바를 알수 있으니 곧 祖先을 追慕하고 宗族을 敦睦하는 마음이 저절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고 한 이 말이 진실로 옳고 또한 族譜序文을 쓰는 사람들이 恒常 하는 말인데 도리어 또 무슨 말로서 우러러 諸宗의 期待에 充足되게 할까.
그러니 가히 서로 더불어 한가지 같이 힘써야 할것이 있다. 대저 姓氏가 世上에 모여사는 것이 나라를 다스림에는 相關없는 것 같으나 周나라 官制에 司商은 賜姓하는 일을 管掌하고 小史는 系譜를 奠定하는 等 官階를 두고 職位를 設定하는 것을 이같이 所重히 하였음은 무슨까닭일까 ? 진실로 생각하건데 天下는 一國의 넓힘이요 一國은 一族의 넓힘이요 一族은 一人의 넓힘이니 이제 一人이 姓을 얻어 그 貫籍을 나타내고 一姓이 族牒를 만들어 그 世代를 記錄하면 統緖가 後世에 밝혀저서 流風이 오히려 存續되고 親愛가 먼곳까지 미치어 遺敎가 泯滅되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有德者를 尊崇하고 賢人을 본받아서 父祖를 辱되게하지 아니하면 이는 一人의 敎化가 一族에 이루어지고 一族의 敎化가 一國에 이루어져서 한나라로부터 天下에 이르기 까지 그 敎化가 漸漸 넓어질 것이다. 그르한즉 聖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氏族을 所重이 여기는 것이 어찌 다만 흐름에 따라 根源을 찾고 잎으로 인헤 뿌리를 알기 爲함 뿐이 겠는가 ?
생각큰데 우리 李氏는 三韓때부터 門閥이 形成되어 지금까지 八百餘年 二十七世에 이러렀는데 世世로 功德과 文章과 節義로서 알려젔으니 始祖 碧珍公은 新羅末에 民生이 塗炭에 빠진 때를 當하여 忽然히 孤城으로서 東,南에 介在하니 麗太祖가 敢히 臣下로 삼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敢히 兵力으로 加害하지 못하였음으로 드디어 嶺南 折半의 百姓으로 하여금 殘忍한 殺傷을 免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開國功臣 爵號를 받고 食邑을 넓혀서 子孫들이 이로 因하여 貫籍을 얻게 되었으니 그 利澤과 業績의 거룩함이 어찌 區區하게 戰爭터에 말을 달려 些少한 功을 바라는 者와 比較되리오 ? 그리고 山花公 같은 분은 文章으로서 재주를 빛내어 國家의 盛名을 울렸으며 耕隱公은 甲戌年에 首陽의 찬탈 징후를 보고 물러났으며 琴軒公은 己卯年에 權奸들의 나쁜짓을 억누르는 等 그 淸名과 直節은 歷史책에 기록하여 빛을 전할만하다. 또 平靖公은 德望과 廉操 및 恬節로서 사림이 추대하여 領袖로 삼아서 지금까지 享祀를 繼續 하고 있으며 忠肅公은 江華에서 殉節하였고 畏齋公(厚慶)과 蘆坡公(屹)은 모두 學行으로서 명성이 높았으니 이는 실로 後孫들이 마땅히 그 忠烈을 이어받고 그 遺業을 繼承하여 永遠히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무릇 우리 同宗의 諸君子는 모두 始祖의 恩澤이 百姓에 미침과 山花(堅幹)의 文章과 耕隱(孟專) 琴軒(長坤)의 明哲 卓 과 平靖(約東)의 德行 廉白 恬退와 忠肅(尙吉)의 節義와 畏齋(厚慶) 蘆坡(屹)의 學行을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삼아서 번갈라 서로 힘쓴다면 앞에서 이른바 『有德者를 尊崇하고 賢人을 본받어면 父祖에게 辱됨이 없게 된다』고 함이 여기에 있을뿐 아니라 또한 大體로 聖朝의 風化에도 많은 도움이 되고 옛 聖王이 百姓의 氏族을 所重히 여기는 뜻에도 符合할것이니 어찌 眞實로 아름답고 盛大하지 않으리요 ? 諸君들은 힘쓸지어다.
나 역시 平靖公의 雲孫으로서 敢히 公의 晩節을 본받아 바야흐로 물려가려고 길을 떠나면서 이 글을 써서 보내나 바쁜데 이끌려서 能히 글쓰는데 힘을 다하지 못했음을 오직 보는 이가 容恕하기를 바라노라.
英祖 元年 1725年 乙巳八月下旬(영조 원년 1725년 을사팔월하순)
後孫 通政大夫 戶曹參議 知製敎 世瑾 謹書(후손 통정대부 호조참의 지제교 세근 근서)
◎庚寅譜跋
(경인보발)
在戊辰年間先人約同人會于族大父淳昌公宅議定修譜之規公之胤族叔父正郞公尸其事文而通之于嶺外諸宗而未克就緖公卽 仕其季龍潭 叔父繼之而收譜未易亦未成書丁丑春歸于世 與시免弟世玧分掌其事通于京外者非止再三而久無相應之議心常歎恨丁亥冬嶺外諸宗大會海印分定諸邑有司修單收錢以辦大事之意通文來報意甚勤也 初欲設所於湖嶺間道理均處以爲京外諸宗往來董事之計矣事有不便更議設所於東郊先祖贊成公墓下以二月始役十月竣事而族侄挺卨終始監董勤且勞矣豈非吾宗之大幸歟第譜者爲傳後也計欲廣收譜牒詳細修正徐待好便以登梓矣遠近諸宗不能齊心曠年持久亦不卽修送及至登梓未免 卒諸派譜牒詳略不同又有遺逸不收之派實非修整者之初計不能無憾於通宗一視之義甚可恨也 噫先正之當初修譜非偶然也 要以此尋衆派之同源明一本之萬支于以定尊卑 疎戚于以收渙散敦親睦則今之增修實出於承先正之遺意以篤親親於無窮者也 夫豈徒然而己也且吾先貽後之德非一二形容而最緊切世守心法四字篆額于卷首要與同宗共勉世德母 八百年家聲是所望也 修譜時京外有司 列于卷後以附宗廟爲榮之義云爾歲 庚子仲秋後孫朝散大夫行 王子師傳世 謹跋
⊙ 壬辰譜跋 譯文(임진보발 역문)
지난 戊辰年間(1688年)에 先人이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約束하여 族大父인 淳昌公(坡)宅에 모여서 族譜編修의 規約을 議論하여 定하고 公의 아들인 族叔父 正郞公(志奭)이 그 일을 맡아서 嶺外諸宗에게 通文을 보냈으나 能히 일을 착수하기도 전에 벼슬길에 나아가니 그의 동생인 龍潭(志尹)族叔父가 이어 받았으나 族譜單子를 收集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역시 譜牒을 完成하지 못하고 丁丑年(1697) 봄에 이 일이 世 에게 돌아온지라 四從弟인 世玧과 더불어 일을 나누어 맡아서 京外에 通知 함이 두세번이 아니였으나 오랫토록 相應하는 의논이 없어서 마음이 恒常 恨歎스럽드니 마침 丁亥年(1707) 겨울에 嶺外諸宗이 海印寺에 많이 모여서 각 고을의 有司를 分定하고 單子와 財錢을 거두어서 큰일을 하자는 通文이 왔는데 그 뜻이 매우 은근하였다.
처음에는 譜所를 嶺南과 湖南사이 거리가 비슷한곳에 設置하여 京外諸宗이 오가며 일을 監督케 하려 하였으나 일하기가 不便해서 다시 議論하여 譜所를 楊州 先祖 贊成公(喜善) 墓下에 設置하고 二月에 始役하여 十月에 일을 마쳤는데 族姪인 挺卨이 처음부터 끝까지 監督하느라 勞苦가 많았으니 어찌 우리 宗門의 큰 多幸이 아니겠는가 ?
또한 族譜란 後世에 傳하기 爲함이니 처음計劃은 널리 譜牒을 거두고 詳細히 修正하여 천천히 좋은 時期를 기다려서 刊行하려 하였으나 遠近諸宗이 마음을 같이 하지 못하여 여러해 끌어오면서 또 진작 單子를 닦아보내지 않았음으로 印刷에 이러렀으는 疎忽하게 끝마침을 免치 못하게 되었으니 諸派譜牒의 詳略이 같지 아니하며 또 單子가 빠저서 거두지 못한 派도 있었으니 이는 實로 修整者의 當初計策은 아니였으나 能히 同宗人을 모두 差別없이 보여야 한다는 義理에는 遺憾이 없지 아니하여 甚히 恨스럽기 그지 없도다.
아 ! 先賢의 當初 修譜는 偶然이 아니었다. 요컨데 이로서 여러 支派의 同源을 찾고 한뿌리에 數萬가지임을 밝혀서 이에 尊卑를 定하고 親疎를 가려서 흩어진 族屬을 거두어서 親睦을 敦篤히 한다면 오늘의 增修함이 實로 先賢의 遺意를 이어받아 이로서 親親을 無窮하도록 敦篤히 하자는 데서 나온것이니 어찌 헛된 일일뿐이 겠는가. 또한 우리 先祖께서 後孫에 끼친 德은 한두가지로 形容할수 없으나 가장 緊要하고 切實한 世守心法 四字를 篆字로 卷首에 썻어니 願큰데 同宗들이 함께 世德을 힘써서 八百年間의 家聲을 失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所望이로다.
修譜時의 京外 有司의 名單을 卷末에 모두 列記하여 宗家祠堂에 붙이게한 것은 榮譽로웟다는 뜻을 이름이다.
肅宗三十六年庚寅(1710) 仲秋 後孫 朝散大夫
(숙종삼십육년경인(1710) 중추 후손 조 산대부)
王世子師傳 世 謹跋(왕세자사전 세환 근발)
◎庚寅譜後敍(경인보후서)
惟我碧珍李氏舊無譜牒族曾大父忠肅公慨然有意於斯蒐輯成書而職務 掌未及 梓矣逮之壬辰年間我曾王考守晋陽始克刊行而世代 久支派益繁後生疎遠多有遺逸之歎袒免兄世 氏爲是之懼乃與不肖參證舊譜益加修正而倉卒登梓尙多誤字凡例序跋未得 刊歲乙巳不肖來守知禮越明年丙午乃捐俸雇工正其 誤仍刊凡例輿序跋積年經營之役於是焉畢矣噫舊譜旣刊於曾王考 晋之時而新譜又成於不肖宰知之日此實不肖莫大之幸而亦庶幾無負先祖敦宗之遺意今而後爲後子孫者可無憾矣歲丙午仲夏下澣後孫通訓大夫行知禮縣監 世玧 謹敍
⊙庚寅譜後敍 譯文 丙午改正(1726)-경인보후서 역문 병오개정
우리 碧珍李氏는 옛날에 譜牒이 없었는데, 族曾大父인 忠肅公이 慨然히 이에 뜻을 두고는 單子를 모아 編輯하였으나 職務에 바빠서 刊行하지 못하였다. 壬辰年間(1652)에 이르러서 나의 曾祖父께서 晋州牧使로 계실때에 비로소 刊行하였으나 世代가 오래되고 支派가 더욱 繁盛하여 後孫이 疎遠해져서 누락됨이 많은 것을 恨歎하였는데 四從兄인 世 씨가 이를 걱정하여 못난이사람과 더불어 舊譜를 參考하고 考證해서 더욱 修正을 더헸으나 갑자기 板刻하였음으로 오히려 誤字가 많았고 凡例와 序文 跋文도 함께 刊行하지 못했다가 乙巳年(1725)에 이 사람이 知禮縣監으로 赴任한 이듬해인 丙午年(1726)에 祿俸을 出捐해서 工人을 雇用하여 그릇됨을 바로잡고 그대로 이어서 凡例와 序文 跋文을 刊行하였으니 多年間 經營해오든 일이 이제야 끝마치게 되었다.
아 ! 舊譜는 이미 曾祖父가 晋州牧使로 계실때에 刊行하였고 新譜는 또 이 사람이 知禮고을 원 일때에 完成하니 이는 實로 이 사람의 크나큰 幸運이요 또한 先祖께서 同宗間에 敦睦하라는 遺意를 거의 저버림이 없었음이니 只今以後 뒷날에 태어나는 子孫되는 사람은 可히 遺憾이 없어리라.
丙午(1726)年 仲夏(陰五月) 下旬 後孫 - 병오(1726)년 중하(음오월) 하순 후손
通訓大夫行知禮縣監 世玧 謹敍(통훈대부행지예현監 세윤 근서)
- 이전글丙戌譜 25.04.09
- 다음글丙子譜序(병자보서) 25.04.09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