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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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戌譜記(純祖丙戌以活字印出于金山景濂書院卽丙戌十一卷譜也)
병술보기(순조병술이활자인출우금산경렴서원즉병술십일권보야)
惟我碧珍李氏譜始自壬辰單卷譜至于庚寅續成五卷譜其後乙酉重修於陜川之崇山功幾訖而旋撤自是以後世代浸遠支派益蕃而骨肉無統昭穆亦紊吾宗先父兄慨然有修譜之意而未遑焉애自辛酉年間宗議始發通于京外者非止一再而丁丑秋會于鷺江壬午春會于泮村是歲十月望又大會于樹村望墓壇下衆口和應分定有司山花大將軍兩派各設所於德峯松林收單鳩財甲申孟夏合局於金陵之景濂院院卽吾平靖公妥靈之所也越三年端陽節始克成編噫若是乎修譜之難也自任辰至庚寅五十九年庚寅而至今丙戌百十有七年矣 玆孱孫重以力屈 就十一冊於曠世之後不負先人之遺志豈非有所待於今日耶至若增刪勘校處見識 전 未盡精核不能無憾於修譜之規覽者怒之丙戌五月 日
丙戌譜記(純祖丙戌[1826]에 金山 景濂書院에서 活字로 印刷한 丙戌11卷譜이다)
우리 碧珍李氏의 族譜가 처음에 壬辰年(1652) 單卷譜로부터 始作하여 庚寅年(1710)에 이르러 五卷譜를 續成하고 그 뒤 乙酉年(1765)에 陜川崇山에서 重修하였으나 일이 거의 끝날무릅에 갑자기 中斷되었다.
이로부터 그 後로 世代가 멀어지고 支派가 더욱 繁盛하여 親族의 系統이 없어지고 昭穆이 또한 흐트러지기에 우리 宗中 어른들이 이를 慨歎하여 修譜할 뜻을 가졌으나 황망중에 미쳐 이루지 못하였다,
지난 辛酉年間(1801)에 宗中議論이 비로서 일어나서 京外에 通文을 낸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丁丑年(1817) 가을에는 鷺梁津에서 모였으며 壬午年(1822) 봄에는 明倫洞에서 會合을 하였고 이해 十月 보름에는 또다시 星州樹村 望墓壇下에서 大會를 열었든바 여러사람의 同意를 얻어서 有司를 分定하였다, 그리하여 山花 大將軍 兩派가 各各 德峰과 松林에 譜所를 設置하여 單子를 거두고 單費를 모아서 甲申年(1824) 四月에 金陵의 景濂書院에 譜所를 合設하였는데 이 書院은 곧 우리 平靖公의 位牌를 모시는 곳이다. 三年이 지난 丙戌年(1826) 端午節에 비로서 能히 編輯을 完成하였다.
아 ! 修譜하기가 이처름 어렵도다. 壬辰年(1652)으로부터 庚寅年(1710)까지 五十九年이요, 庚寅年(1710)에서 丙戌年(1826)까지 百十七年이다. 작고 약한 이 子孫들이 몹시 힘에 겨워서 겨우 十一卷譜牒을 오랜세월을 거처서 이루었으니 先人의 遺志를 저버리지 아니함이 어찌 오늘을 기다린바가 아니겠는가. 追加하고 削除하며 調査하고 校正함에 있어서는 見識이 얕아서 精密하고 仔細하지 못해서 修譜하는 規約에 遺憾이 없을수 없으니 보는 사람은 容恕하기 바라노라.
丙戌(1826) 五月 日
◎丙戌譜序(純祖丙戌以活字印出于金山景濂書院卽丙戌11卷譜也)
병술보서(순조병술이활자인출우금산경렴서원즉병술11권보야)
學問文章節義淸白四者人以之紀國以之維四者闕一猶車而無 也古之袁楊王謝崔盧諸家及 國朝簪纓世家號爲甲乙族者或以勳業著或以閥閱稱然能兼有此四者盖鮮見焉而獨碧珍李氏與麗祖 興金紫銀靑奕葉相乘名賢鉅公曠世相望若山花元師耕隱老村月塢琴軒浣亭德巖畏齋蘆坡忠肅忠剛龍巖嗇菴果齋靜軒諸公以此四者笙簧乎一國琬琰乎百世朝乘野史不可勝書又竊嘗見近世辛壬士禍爲汚隆消長之一大機會而李氏之或棄官或竄斥流光於當時史策者爲十餘人一時名節曜人耳目世皆以東邦名族稱 我 正宗大王嘗於燕閑之暇與諸閣臣品 諸士大夫家數而等第之碧珍之李함稱之曰淸族也淸族也如是者三於是乎登 筵諸臣之以巨室稱者 然 口莫之敢先夫然則世之以目下榮悴論者可謂淺之又淺矣李氏舊有譜傳之凡幾年其後承又能繼述先志 纂輯凡十一編小子李氏自出亦嘗與聞斯役竊爲之言曰譜碧珍也 乃碧珍之黨 於人則必書某之配某郡某氏某之子若孫某之外孫乃他姓入於碧珍之門則必書某之女某郡某公生子某外孫某一披譜而無姓不入凡國內世族相與爲某族婦族姑姨之族 之族隨派錯綜燦如星絡譜之不可閥如此同一 源黃氏而山谷與益陽主簿爲高祖之親乃至六十年不相識同一新安祝氏而爲王樞密婦家爲呂端公婦家爲朱韋齋婦家朱氏外孫而又及於黃勉齋由此觀之譜閥焉則同姓遠譜作焉則異姓篤卽是書窮源溯流盖不獨爲碧珍之譜也 嗚呼一人之身散而爲百千萬億禮服雖悠昭穆俱箸尊祖敬宗之義敦厚睦 之風又安得不由譜而相勤也哉其規晝間架舊序己詳有不可疊牀也是爲序 崇禎紀元後四丙戌孟春上澣外裔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事安東金陽淳謹序 (文成於撤局之後未能登錄故今始追刊)
丙戌譜序 譯文 (純祖丙戌[1826]에 金山 景濂書院에서 活字로印刷한 丙戌11卷譜이다)
學問, 文章, 節義, 淸白의 네가지는 사람은 이것으로 綱紀로삼고 國家는 이것으로 綱維를 삼는 것이니 네가지 中에 하나만 빠저도 수레에 멍애와 끌채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옛날(中國에) 袁氏, 楊氏, 王氏, 謝氏, 崔氏, 盧氏 等 諸家와 우리나라에서 代代로 높은 벼슬을 해온 집안을 甲族, 乙族이니하여 或은 勳業으로 드러네고, 或은 閥閱로 칭송되고 있으나 그러나 能히 이 네가지를 兼備한 家門은 거의 보기 더물다. 오직 碧珍李氏는 高麗朝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서 金紫光祿大夫와 銀靑光祿大夫 等으로 代代로 벼슬이 이어지고 名賢과 鉅公이 世上에 더물게 잇따라 나타낫으니 山花(堅幹) 元師(希慶) 耕隱(孟專) 老村(約東) 月塢(鐵均) 琴軒(長坤) 浣亭(彦英) 德巖(碩慶) 畏齋(厚慶) 蘆坡(屹) 忠肅(尙吉) 忠剛(尙伋) 龍巖(尙逸) 嗇菴(世玉) 果齋(世 ) 靜軒(世 ) 같은 諸公은 이 네가지로써 一國을 울리고 百世의 보배가 되어서 國史와 野史에 가히 다 記錄할수 없었다. 또한 가만히 近世를 살펴보면 辛壬(1721-20史禍가 興亡盛衰의 一大機會였는데, 李氏는 或은 벼슬을 버리고 或은 쫓겨나고 귀양가서 當時의 歷史를 빛넨 이가 十餘人이 되었기에 한 時代의 名譽와 節操가 사람들의 耳目에 빛났으니 世上사람들이 모두 東國의 名族이라 稱하였다,
우리 正宗大王께서 어느 閑暇한 때에 奎章閣의 여러 官員들과 더불어 모든 士大夫家數를 品定하여 等級을 매겼는데 碧珍李氏에 이러르서는 자주 칭송하여 이르기를 『淸族이로다 淸族이로다』이렇게 세 번이나 말씀하니 이에 그 자리에 있든 여러臣下들 中 巨室로 呼稱되든 이들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입을 벌리되, 敢히 碧李에 앞선다고 못하였다. 그르한즉 世上에 目前의 榮華와 衰退를 論하는 者는 可히 淺薄하고 또 淺薄하다고 이를 것이다,
李氏家門에는 옛부터 族譜가 있어서 傳해온지 무릇 여러 해더니 그 後孫이 또 能히 祖上의 뜻을 이어 받아서 무릇 十一編의 冊을 纂輯하였다. 이사람은 李氏로부터 出生 하였으며 또한 일찍이 譜役의 所聞을 듣고 가만히 말하기를 『碧珍李氏의 族譜를 編纂한다』 는 것은 곧 碧珍李氏의 族黨이 남에게 장가들면 반드시 누구의 配는 어느고을 아무 姓氏 누구의 子息 孫같으면 누구의 外孫이라 쓰며 이에 他姓이 碧珍門에 장가들면 반드시 누구의 女息은 어느 고을 아무이며 아들 누구 外孫 아무라 써서 한번 族譜를 펴 보면 들어있지 않는 姓氏가 없어니 무릇 國內 世族들이 서로 더불어 某族의 婦族이 되어 姑姨族, (동서)族이 派에 따라 뒤썩겨 별빛처름 빛나니 族譜가 없어서는 아니됨이 이와 같도다. 같은 源黃氏로서 山谷과 益陽의 主簿는 同高祖의 親族이 되면서도 六十年이나 서로 알지 못했으며 같은 新安祝氏로서 王樞密의 婦家도 되고 呂端公의 婦家도 되며 朱韋齋의 婦家도되고 朱氏 外孫으로서 또 黃勉齋에게도 미치니 이로서 연유하여 보건대 族譜가 없어면 同姓도 멀어지고 族譜가 만들어지면 異姓이라도 敦篤해 지는것이니 곧 이 冊의 『本源을 窮究하고 流派를 거슬러보면 아마 碧珍李氏의 族譜만이 아닐 것이다』 고 하였다.
아 ! 한사람의 몸이 흩어져서 百 千 億의 子孫이 되어서 服制(寸數)는 비록 멀어도 昭穆은 모두 뚜렸하니 尊祖 敬宗하는 義理와 敦厚 睦姻하는 風習이 또한 李氏 族譜를 緣由하지 않고 서로 勸奬하겠는가 ? 그規劃과 짜임세는 옛 族譜의 序文에 이미 仔細히 說明되어 있음어로 거듭 羅列하는 것은 옳치 않아서 이로서 序文을 삼는다.
丙戌(1826) 正月上旬 外孫 嘉善大夫 吏曹參判兼同知經筵事 安東 金陽淳 謹序
◎丙戌譜序(병술보서)
(純祖丙戌以活字印出于金山景濂書院卽丙戌11卷譜也 ○堯山公遺集中謄出今始追刊)
(순조병술이활자인출우금산경렴서원즉병술11권보야 ○요산공유집중등출금시추간)
族有譜何詳派分也 我碧珍氏發源長而流派遠代不失爲衣冠族而玄胄遙遙舊無譜牒觀察龍巖公嘗牧于晋慨然與諸宗議始 成書捐俸而 行焉其後雲仍寔繁昭穆寢廣則又蒐輯而增脩之使疎宗遠裔咸得以秩然有序靡有遺憾於是乎碧珍之譜家播而有所稽矣板旣成藏之金陵寺寺不戒火不幸爲鬱攸所 燼惜乎辛勤 之功將至湮泯無所徵哉京外諸宗謨欲重刊續成先業者殆累十年而歲月侵尋 于今莫之就歲 灘之孟夏節乃設所於金陵之景濂院越明年五月工始手宗英某某氏實相其事而分幹焉舊譜則仍之而續牒則校而略加刪正雖後生晩出一寓目而歷歷該所自可以詳源流而講花樹此經始是譜之意也是譜也成而 而復成者抑亦有數存焉微諸宗無以悉其力而收其功也役將訖僉宗屬余曰此吾宗重事子其可無一言以弁卷請詳顚末以識之余以俚拙 不敢承至再而不獲命則於義終不可以不逮辭謹拱揖以復之曰世之名門望族震耀一代者非不赫 美矣而宿德雅望未必皆其人也 惟我李自鼻祖濟民保郡之後名公偉卿綿歷不絶至山花先生大將軍公而尤炳靈光大山花之後有若耕隱琴軒月塢星山君浣亭枏溪慕巖滄洲諸公踵德而蜚英大將軍之後有若平靖畏齋復齋蘆坡忠肅忠剛龍巖僉賢趾美而 聲其他砥名勵行馳芬播馥者錯落相望於一譜之中而中而又必以淸白忠謹四字爲家庭傳授之訣則其特書於譜卷之首者所以誌也想祖德念先訓而孝親忠君之心其亦油然而生矣後之覽者其 追興感亦必如今日則豈特爲百世敦睦之誼抑垂裕貽則之一家藏也 嗚乎可不謂 而乎可不 然思所以繼述之乎一有忽於此而 前人風者是 吾先也吾宗人之所相與勉勵者不在斯歟旣以是 諸宗仍以識于記末而爲之警歲丙戌孟夏上澣後孫幼學存永謹序
丙戌譜序 譯文 (純祖丙戌年에 金山의 景濂書院에서 活字로 印出하였으니 곧 丙戌11卷譜이다. 堯山(存永)公 遺集中에서謄出하여 이번에 처음으로 追刊하였다)
氏族이 族譜를 만드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면 派系를 詳細히 하고자 함이다, 우리 碧珍李氏는 發源이 길고 流派가 멀리뻗어 代代로 衣冠族의 品位를 잊이 않았고 後孫이 아득햐게 이어저왔다, 옛날에는 族譜가 없었는데 觀察使인 龍巖公(尙逸)이 일찍이 晋州牧使로 걔실 때에 이를 慨歎해서 諸宗과 더불어 議論하여 비로서 資料를 모아 編輯한후 祿俸을 出捐하여 刊行하였다,
그 뒤에 子孫이 實로 繁盛하고 昭穆이 차츰 넓어 졌음으로 또 蒐輯하여 增修함에 먼 親戚이나 그 後孫들로 하여금 모두 秩序가 整然하여 遺憾이 없게 되었으니 이제야 碧珍李氏의 族譜가 집집마다 配付되어 詳考할수 있게 되었다, 그르나 刻板이 이루어져서 金陵 直指寺에 保管하였드니 절에서 불조심을 아니하여 不幸하게도 全部 타버렸으니 哀惜하도다. 몹시 애써 새긴 功이 湮滅되어 證據마저 없단 말인가 ! 京外諸宗이 重刊을 해서 先業을 繼續하여 이룩하려고 꾀한지 거의 數十年이 되었으나 歲月만 차츰 흘러 지금까지 이루지 못했다가 甲申年(1824) 초여름에 이르러서야 金陵 景濂書院에 譜所를 開設하고 그 다음해 五月에 工役을 처음 着手하여 宗親 某某氏가 實際로 그일을 도와서 分擔하였는데 舊譜는 그대로 싣고 續譜는 校正하여 약간의 刪正을 더하였으니 비록 以後에 出生하는 子孫들이라도 한번 눈여겨 보면 自身의 位置가 뚜렸해저서 根源과 派流를 詳考하게 되고 一家의 族誼를 익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이 族譜를 만든 뜻이다.
이 族譜가 이루어 졌다가 불에타고 燒失되었다가 다시 이루어진 것은 그나마도 또한 運數가 있음이나 諸宗이 아니었다면 그 힘을 다하여 그 일을 完成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일을 마칠무렵에 여러宗親이 나에게 付託하기를 『이는 우리 宗中의 重大한 일이니 당신께서 한 말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 책머리에 始末을 仔細이 적어라』 고 請하거늘 내가 옹졸하고 操心스러워서 敢히 받아들일수 없다고 그듭 말하였으나 그렇게 하라는 분부를 받지 못하였고 또한 義理上 끝내 辭讓할수도 없어서 삼가 손을 모아 捐하고 復命하였다. 世上의 名門과 望族들이 한 시대를 떨처 빛낸이가 赫赫하여 아름답기는 하나 오래된 德望과 깨끗한 人望을 반드시 그사람들 모두가 다 갗춘 것은 아닐 것이다. 오직 우리 李氏는 始祖께서 百姓을 救濟하고 고을을 保存한 以後로부터 이름난 宰相과 훌륭한 卿大夫가 오랜 歲月 끟이지 아니 하였다. 山花先生(堅幹)과 大將軍(成幹)에 이르러서는 더욱 빛나고 偉大 하였으며 山花先生의 後孫으로는 耕隱(孟專) 琴軒(長坤) 月塢(鐵均) 星山君(軾) 浣亭(彦英) 枏溪(重茂) 慕巖(忠民) 滄洲(昌鎭) 等 諸公이 先德을 이어 뛰어났고 大將軍의 後孫으로는 平靖(約東) 忠肅(尙吉) 忠剛(尙伋) 龍巖(尙逸) 畏齋(厚慶) 復齋(道孜) 蘆坡(屹) 等 여러 賢人이 先代의 훌륭함을 쫓아 名聲을 날렸으니 그밖에도 名節과 行實을 갈고 딱아서 향내음을 世上에 傳播한 분들이 한 族譜中에 많이 썩겨있다. 또한 반드시 淸白忠謹 四字를 집안에서 傳授하는 秘訣로 삼았으므로 族譜 卷首에 特書한 것은 그것을 알리기 爲해서 記錄한 것이다. 祖上의 恩德을 생각하고 先祖의 敎訓을 잊지 않으면 어버이에 孝道하고 나라에 忠誠하는 마음이 또한 저절로 생겨날 것이다. 뒷날에 이 族譜를 보는 이가 追慕하고 興感하는 바가 또한 반드시 오늘과 같으면 어찌 다만 百世敦睦의 族誼 뿐아니라 또한 後孫에게 물려줄 遺德을 傳하고 規範을 끼쳐주는 家寶일 것이다.
오호라 ! 어찌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수 없어며 그것을 繼述할 것을 조심스릅게 생각하지 않을수 있으리오 ? 조금이라도 여기에 疏忽하여 前人의 遺風을 失墜시킨다면 이는 우리 祖上을 辱되게 하는 일이니 우리 宗人들은 서로 더불어 힘써야 할바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 따라서 이 말로서 諸宗을 힘쓰게하고 이어서 卷末에 記錄하여 警戒를 삼고자 하노라.
丙戌年(1826) 孟夏(四月) 上旬 幼學 存永 謹序
(병술년(1826) 맹하(사월) 상순 유학 존영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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