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족보

HOME > 구족보

壬子譜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덕명
댓글 0건 조회 12회 작성일 25-04-09 10:16

본문

壬子譜序 譯文 (1912年)
堯임금때에 理官의 벼슬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理字의 音이 李와 비슷함으로 李라는 姓을 주었고 周나라 末年에 守藏史인 老聃이 오얏나무를 가리켜 姓을 말했기 때문에 또한 李로 姓을 삼게 한것이니 李가 姓이 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비롯되어 漢나라 이래로 드디어 天下의 著名한 姓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또한 이 姓으로서 이름난 名門이 거의 열몇이 되는데 高麗初期에 큰 功勳으로서 碧珍地方을 封地로 받은 諱 총언이 우리 始祖이다.

한나무의 뿌리를 북돋우어 香氣로움이 百世에 傳해저서 高貴한 人物과 德望이 높은 碩學이 代代로 끊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祖上이) 길러주신 慶事요 남기신 蔭德인데 다만 恨스러운 것은 世代가 漸漸 멀어짐에 支派가 나누어 저서 派系가 달라지고 服이 다 되어서 戚分이 끝나가니 거의 남과 같아서 문득 서로 알지 못하게 되면 또한 會稽의 合譜와 汾陽의 失族과 같은 事例가 없지 않을까 念慮된다.

이것을 두려워해서 壬辰譜와 庚寅譜를 먼저 編修하였고 丙戌譜와 甲子譜를 뒤이어 修譜하였는데 그 規模의  大함과 節目의 詳細함과 校定의 精密함이 先祖를 빛내고 子孫을 넉넉하게 하여 可히 無窮토록 傳할만하다.

그르나 近來에 世上이 昏迷해지고 人倫의 綱紀가 허물어저서 萬若 眉亭(沈仁業)과 廬陵(歐陽修)의 譜牒처름 다시 編修하지 아니하면 河南(程子)의 講會와 韋(代) 園中의 會合을 진실로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옛날 壬辰年과 庚寅年 사이와 丙戌年과 甲子年 사이를 거슬러보면 或은 五十九年과 三十九年이며 이제 甲子年이 지난지가 또 이미 四十九年이므로 族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文安公(堅幹)과 正獻公(建之) 兩先祖의 爵謚가 世上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드러나고 그후 文獻에 분명이 나타났는데 이는 實로 神明께서 啓導함이니 우리 後人들은 모두 祖先의 名聲과 光輝를 나타내어 萬世에 알려야 할 것이다. 이때에 이 族譜를 만든 일은 偶然이 아니요 또한 여러 宗人들이 纘述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니 그르한즉 오늘의 修譜하는 뜻이 어찌 다만 昭穆을 밝히고 系牒을 익히는데 있을 뿐이랴 ?

經傳에 이러되 "先祖를 尊敬하기 때문에 宗家를 恭敬하고 宗家를 恭敬하기 때문에 宗族을 收合한다" 고 하였으니 대저 尊祖, 敬宗, 收族하는 세가지가 修譜하는 大綱領이요 또 尊祖하고 敬宗하는 道理가 둘이 있으니 孝道와 友愛가 그 根本이 된다. 아 ! 우리 모든 宗人들은 經傳에 이른 바와 같이 "사랑은 어버이를 親愛함으로부터 이루며 恭敬은 어른을 恭敬함으로부터 이룬다"라 하였으니 祖上을 辱되게 하지 말고 끊임없이 이어 간다면 비록 族譜가 없어도 될것이니 그러나 程子가 가로되 『天下의 人心을 管理 함에는 宗族을 收合하고 風俗을 敦厚하게 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根本을 잊지 않토록 해야하는데 모름지기 譜系를 밝혀야 한다』 라고 하셨듯이 대체로 族譜가 또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돌이켜 보건데 이 사람은 病이 날로 甚하여 한번도 能히 여러분들이 考據하고 印刊하는 末席에도 나아가서 뵈옵지 못하고 敢이 이를 云云함이 極히 참람한줄 알면서도 그르나 敢히 여러분의 勤喩를 저버리지 못하여 삼가 이를 써서 空間에 두노라.
壬子(1912) 十月 下旬 承源 敬書
◎壬子譜跋(임자보발)
於乎此吾世譜五度續修者也 編輯之規比舊稍異而簡詳則殆過之且博采先蹟以補文獻之不足 一家百世之信史也 盖此續修之議始起於 上皇丁酉而詢謀不一設局旋撤間或有各修派系者揆諸通宗一視之義則猶未盡善後十有四年庚戌更議修擧雖平靖一派始同終異然文安典書文靖諸家則統會于一矣遂以辛亥之春開廳於星州之汶谷精舍曆三年而功告訖是役也 門大父承源氏 擧焉德厚氏訂正焉承慤尙厚氏管攝而終始之愚澈承萬氏協和而贊成之他各事其事者則有不能枚焉譜旣成僉父老謂貞基粗有文字之役命識卷後顧  渺末其何能爲役無己則有一言可復譜者史也 而褒善而無貶惡親親之恩也 昔我列祖積學脩德處家爲孝子慈父立朝爲良臣節士名光竹帛澤流來雲今我輩後承受乃祖之氣處乃祖之家讀乃祖之書而不能 乃祖之心則可乎且前輩所以三復致意於母 之訓也 斯義也今古敍述備矣猶復云云者外是則無可陳余故曰觀吾譜者勿以親親之恩施諸自修之地庶幾知所用力矣因記其說爲世譜跋歲壬子 月下弦后孫貞基謹書
壬子譜跋 譯文
아 ! 이것은 우리 世譜를 다섯 번째 續修한 것이다. 編輯의 規例가 舊譜에 比하면 조금 다르지만 幹略하면서도 詳細함은 자못 낫다. 또 先祖의 事績을 널리 采取하여 文獻의 不足함을 補充하였으니 眞實로 一家百世의 믿을수 있는 史牒이로다.
대개 이 續譜를 編修하자는 議論이 高宗 丁酉年(1897)에 처음 일어 났으나 意見이 一致되지않아서 譜所를 開設하였다가 도로 撤收하였드니 間或 派系別로 各各 修譜하자는 이가 있었으나 이는 모든 家族을 同一視 하자는 뜻어로 해아려보면 오히려 最善을 다한일이 아니므로 十四年後인 庚戌年(1910)에 다시 修譜할 것을 議論하여 擧行하게 되었는데 비록 平靖公派가 처음에는 뜻을 같이 했다가 나중에는 달리 하였으나 文安公派 典書公派 文靖公派에서는 뜻이 하나로 모이게 되어 마침내 辛亥年(1911) 봄에 星州의 汶谷精舍에서 譜廳을 開設하여 三年이 지나서 일을 마쳤다.

이 일을 族祖인 承源氏가 檢擧를 맡았으며 德厚氏가 校正을 맡고 承慤氏 尙厚氏가 감독을 맡아 始終하였고 愚澈씨 承萬氏가 協和를 맡아서 도왔으며 其他 各各 그 일을 맡아 일한사람은 일일이 列擧할수 없다.

族譜가 임이 이루어지자 여러 어른들이 貞基에게 『조금 글쓰는 일을 한바 있다고 하여 卷末에 跋文을 적어라』 고 命하였다. 이를 도리켜보면 (저같은) 微末이 그 어찌 能히 이 일을 할수 있어리오마는 마지 못하여 한마디 말씀을 올린다.

族譜는 家門의 歷史로서 善을 포상하되 惡을 貶下하지 않는 것은 親族을 親愛하는 恩誼이다. 옛날 우리의 여러 祖先이 學業을 쌓고 德行을 닦아서 家庭에 있어서는 孝子와 慈父가 되고 朝廷에 나아 가서는 良臣과 節士가 되어서 이름이 歷史에 빛나고 恩澤이 子孫에 傳해졌으니 이제 우리 後孫들이 祖先의 精氣를 이어 받아서 祖先이 살든 집에서 살고 祖先이 읽든 글을 읽어면서 能히 祖先의 마음을 體得하지 못한다면 옳겠는가 ? 이것은 또한 先輩들이 여러번 되풀이 한 까닭은 祖上을 辱되게 하지 말라는 訓戒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뜻은 古今의 敍述에 모두 쓰여 있어니 오히려 거듭 말하는 것은 이밖에 더 할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르머로 말하근데 『우리 族譜를 보는 이는 親族을 親愛하는 恩誼로서 自己의 德行을 딲는데에 배풀지 마라야만 거의 힘쓸 바를 안다 할 것이다』 인하여 그 말을 記錄하여 世譜跋文을 삼는다.
壬子年 十二月 二十三日 後孫 貞基 謹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