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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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01.png 건지(建之)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헌공(正獻公)이시다. 공(公)은 임금님이 내리신 이름은 천달(天達)이라 하시고 자(字)는 자춘(子春)이며 문안공(文安公) 산화선생(山花先生)의 현손(玄孫)이시다. 나이 13세(十三歲)에 경사(經史)를 통달(通達)하셨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셨는지라 태조(太組) 4년(四年) 을해(乙亥, 1395)에 제자원(弟子員)에 선발(選拔)되어 상국(上國)에 유학(遊學)하시어 태종(太宗) 6년(六年) 병술(丙戌, 1406)에 갑과(甲科)에 합격(合格)하였으며 곧 장보(張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안남(安南)을 정벌(征伐)하는 전쟁(戰爭)에 참전(參戰)하여 안남(安南)을 평정(平定)하니 황제(皇帝)가 남경별기영도위(南京別騎營都尉)란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태종(太宗) 9년(九年) 기축(己丑, 1409)에 환국(還國)하시어 3년(三年) 동안에 두 번이나 병조(兵曹)에 임명(任命)되었다. 북경(北境)에 오랑캐가 번성하여 무도하게 횡행(橫行)하니 조정신하(朝廷臣下)들이 공(公)을 추대(推戴)하여 이도(二道:함경도(咸境道), 평안도(平安道)) 경략사(經略使)를 삼으니 은덕(恩德)으로 힘써 정사(政事)를 행(行)하니 북경(北境)이 다 평화(平和)롭게 되었다. 태종(太宗) 15년(十五年) 을미(乙未, 1415)에 천관정경(天官正卿)으로 하정사(賀正使)에 선임(選任)되어 정주(定州)땅으로 행차 중(行次中) 노병(路病)으로 돌아가셨는지라후사(後使)가 이르러 천자(天子)께 그 형상(形狀)을 알리니 천자(天子)께서 심히 슬퍼하셨다. 태상(太常)이 천자(天子)께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충성(忠誠)스러운 신하(臣下)입니다.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하여 용처(用處)에 합당(合當)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지야(智也)오, 정사(政事)를 덕(德)으로써 하여 먼 오랑캐가 감복(感服)을 하니 인야(仁也)오, 한결같은 마음으로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어렵고 험난함을 피(避)하지 아니하니 공야(恭也)오, 청렴하고 예(禮)가 있어 벼슬에 거(居)하기를 청백(淸白)하니 검야(儉也)라. 정헌(正獻)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심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천자(天子)께서 가당(可當)하다고 결재하여 내리시니 이 모든 것이 그 분의 입신본말(立身本末)의 사실(事實)의 기록(記錄)이다.

 

p001.png 심지(審之)

조선(朝鮮) 태종(太宗) 8년(八年) 무자(戊子, 1408)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선정(善政)으로써 명망(名望)이 널리 알려졌으나 경인년(庚寅年, 1410)에 모친상(母親喪)을 당(當)하여 거환(去宦)하였고 그 후(後)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역임(歷任)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선산(善山) 금오산하(金烏山下) 형곡리(荊谷里)에 이거(移居)하였다.

 

p001.png 수지(粹之)

벼슬이 승훈랑(承訓郞) 운봉감무(雲峰監務)에 이르렀다. 성주(星州)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에 이거(移居)하였다.

 

p001.png  신지(愼之)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이르렀으며 아들 명겸(鳴謙)의 귀(貴)로 인(因)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창녕현(昌寧縣) 합산리(合山里)에 이거(移居)하였다.

 

p001.png 사지(思之)

호(號)는 여은정(麗隱亭)이고 벼슬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두문동(杜門同) 72현(七十二賢)의 한 분이다.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더불어 친분(親分)이 있어 시문(詩文)을 곧잘 주고받으면서 서로 뜻을 보였다. 밀양(密陽) 용안서원(龍安書院)에 배향(配享)하고 있다.

 

p001.png 희조(希祖)

자(字)는 국임(國任)이다. 부친(父親)의 비명(非命)을 통분(痛憤)하여 신분(身分)을 바꾸고 이름을 달리해서 고양(高陽)에 은거(隱居)하였다. 신원(伸寃)된 후(後)에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p001.png 존인(存仁)

호(號)는 두은(杜隱)이다. 널리 배우고 도탑게 뜻을 두어 문장(文章)이 훌륭하고 기상(氣像)이 뛰어나서 고과(高科)에 발탁(拔擢)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였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승자(陞資)하여 충성(忠誠)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報答)하면서 힘든 일에 종사(從事)하기를 성력(誠力)을 바쳤으나 세상(世上)이 망극(罔極)함을 만나서 벼슬에 안주(安住)하지 아니하고 단산(丹山)의 임천(林泉)으로물러나 은거(隱居)하면서 평소(平素)의 뜻을 지켰다.

 

p001.png 존례(存禮)

벼슬이 중랑장(中郞將). 스스로 시운(時運)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고 물러나 가야(伽倻)의 증산(甑山)에 우거(寓居)하면서 시주(詩酒)와 금서(琴書)로 즐기면서 만년(晩年)을 보냈다. 뒤에 지례(知禮) 니전(泥田)으로 이거(移去)하였다.

 

p001.png 약동(約東)

자(字)는 춘보(春甫), 호(號)는 노촌(老村) 태종(太宗) 16년(十六年) 병신(丙申, 1416) 6월 초2일(방주(傍註)에 10월은 오기(誤記)이므로 바로잡음)에 나셨다. 강호 김선생 문하(江湖金先生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수업(受業)하시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매계(梅溪) 조위선생(曺偉先生)과 일향(一鄕)에서 같이 나시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교유(交遊)하셨다. 필재(畢齋)로 더불어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일찍이 선생(先生)을 사모(思慕)하여 시(詩)로써 찬미(讚美)하기를 공(公)께서는 시서(詩書)에 통달(通達)하여 진실(眞實)로 사문(斯文)에영수(領袖)요 한 조각 청빙(淸氷)을 옥(玉)병에 담은 것 같고 수월(水月)같은 마음에 송죽(松竹)같은 절의(節義)와 간관(諫官)에 비로소 현재(賢才)를 얻었음이라 나라에 큰 정책(政策)을 세워서 올리고 임금님을 가까이 뫼시면서 충성(忠誠)을 다하였네 천부(天賦)의 자질(資質)로 문무(文武)를 겸(兼)하여 웅장(雄壯)한 뜻 펴셨고 문무(文武)와 재능(才能)에 덕(德) 또한 갖추셨네. 시서예문군자(詩書禮文君子)시나 군율(軍律) 또한 엄숙(嚴肅)하여 어백사(於百事) 반열 중(班列中)에 삼달존(三達尊:덕고(德高), 치고(齒高), 위고(位高))을 지니셨네. 묘당(廟堂:조정(朝廷))에서 군덕(君德)을 보익(輔益)한 인물(人物)을 뽑는다면 공론(公論)이 응당(應當) 공(公)에게 집중(集中)될 것이로다.

 

나시어 학문(學問)에 오로지 뜻을 두고 경전(經典)과 서전(書傳)에 박학(博學)하여 덕망(德望)과 행의(行誼)가 유림(儒林)의 영수(領袖)로다.

세종(世宗) 신유(辛酉, 1441)에 진사(進士)를 하시고 문종(文宗) 신미(辛未, 1451)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문무(文武)로 내외(内外) 청요직(淸要職)을 역임(歷任)하셨다. 오묘(五廟:다섯 임금)를 섬기시면서 도백(道伯)과 여덟 고을 수령(守令)을 지나면서 빙옥(氷玉)같은 청렴결백(淸廉潔白)으로 치적(治績)이 높아 백성(百姓)에게 은혜(恩慧)를 베푸셨다.

 

성종조(成宗朝)에 공신(功臣)으로 좌리원종훈(佐理原從勳)에 책록(策錄)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기(任期)가 차서 돌아오실 때에 괘편(掛鞭)과 투갑(投甲) 등의 이적(異績)이 있다. 《국조여지승람(國朝輿地勝覽)에 목사(牧使)로 있다가 임기만료(任期滿了)로 돌아오실 때에 말채찍 하나를 손에 가졌을 뿐인데 이것도 섬 물건(物件)이다 하고 누각(樓閣)에 걸어놓고 오시었다. 세월(歲月)이 오래되어 채찍이 상(傷)하여 땅에 떨어지니 고을 사람들이 이 광경(光景)을 그림으로 그려서 선생(先生)을 사모(思慕)하였다.》하고 또 돌아오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빙빙 돌면서 기우뚱거리는지라 위태로운 가운데 선생(先生)은 조금도 동요(動搖)됨이 없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나는 조금도 사리(私利)를 탐하여 죄(罪)지은 일이 없는데 막료(幕僚) 중에 누군가 부정(不正)을 하여서 신명(神明)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치게 한 것이 아닌가!” 하심에 과연(果然) 휘하(揮下) 사람이 장차 선생(先生)을 위(爲)하여 갑옷 한 벌을 숨겨가지고 오는 일이 있었다고 사실(事實)대로 고(告)함에 선생(先生)께서 명(命)하시어 바다에 던지게 하니 파도(波濤)가 잠잠하고 배가 순항(順航)을 하기에 이르러 모두들 선생(先生)의 청빙(淸氷)같은 염조(廉操)에 신(神)도 오욕(汚辱)되게 함을 싫어하여 이와 같은 작란(作亂)을 한 것이다 하였고,〈관광객(觀光客)을 위(爲)하여 투갑연(投甲淵) 현지(現地)에 사실기(事實記)가 있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셨으며 대사간(大司諫), 경주(慶州) 및 한성부윤(漢城府尹), 개성유수(開城留守), 전라감사(全羅監司), 이조(吏曹)ㆍ호조참판(戶曹叅判),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나시고 기로사(耆老社)에 드시었으나 연로(年老)하여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시고 고향(故鄕) 하로촌(賀老村)에서 우유소일(優遊消日) 하셨으니 선생(先生)께서는 청덕(淸德)과 아망(雅望), 염조(廉操)와 염절(恬節)로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셨다.

 

성종(成宗) 24년(二十四年) 계축(癸丑, 1493) 6월 13일에 하세(下世)하시니 78세(七十八歲)를 향수(享壽)하셨다.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 심히 슬퍼하시어 예조정랑(禮曹正郞)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여 고유(告諭)하기를 천자(天資)가 단아(端雅)하고 매사(每事)에 근신(謹愼)하며 성품(性品)이 순결(純潔)하고 정직(正直)하여 외지(外地)에 나아가 고을을 다스림에 치적(治績)이 제일(第一)이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고 인애(仁愛)로 백성(百姓)을 구휼(救恤)함이 그 마음 감이(甘梨:단 배)와 연꽃 같아라.지난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재임 시(在任時)에 진실로 격려(激勵)와 보익(輔益)을 받았는지라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곧 벼슬 품계를 높이려 하였는데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망극(罔極)한 지경(地境)에 이르게 하였으니 경(卿)의 부음(訃音)을 듣고 탄식(歎息)스럽고 애석(哀惜)한 마음 금(禁)할 길 없어 평정(平靖)으로 시호(諡號)를 내리노라.

 

시법(諡法)에 “정사(政事)를 집행(執行)함에 절제(節制)있음을 평(平)이라 하고 유화(柔和)한 덕행(德行)으로 여러 사람을 편안(便安)케 함을 정(靖)이라 한다.” 하였다.

한라산(漢拏山) 백록담(白鹿潭)에서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제사(祭祀)지내던 풍속(風俗)으로 백성(百姓)의 고통(苦痛)이 많았던 바 이를 산하(山下) 평지(平地)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기로 변경(變更)하고 전래(傳來)의 악습(惡習)은 폐지(廢止)하고 선량(善良)한 풍속(風俗)은 천양(闡揚)하여 여러 시책(施策)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취용(取用)하므로 도민(島民)이 크게 기뻐하여 선정(善政)을 송덕(頌德)하고 영원히 존모(尊慕)하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을 건립(建立)하였다. 이름하여 부르기를 영혜사(永惠祠)라 하고 제주(濟州)에 있다.

 

금산(金山) 경렴서원(景廉書院)과 제주(濟州) 귤림사(橘林祠)에서 향사(享祀)를 하여 오다가 방령(邦令)으로 훼철(毁撤)된 후 유림(儒林)의 공론(公論)으로 선생(先生)이 계시던 곳에 하로서원(賀老書院)으로 편액(編額)하여 복원(復院)하고 또한 금세(今世)에 제주도(濟州道)에서 유적(遺蹟)을 기리기 위(爲)하여 기적비(紀績碑)를 곰솔공원 경내(境内)에 수립(竪立)하였다.

 

선생(先生)이 자손(子孫)에게 유계(遺戒)한 시(詩)에 “가난하고 어려워도 분수(分數)대로 살지어다. 쪽박과 낡은 옹기 나의 전 재산(財産)이라. 주옥(珠玉)이 만당(滿堂)해도 씀에 따라 없어지니 청렴결백(淸廉潔白) 가훈(家訓)으로 아손(兒孫)에게 전(傳)하리라.” 하였다.

 

p001.png 존신(存信)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이며 호(號)는 한계(寒溪)이다. 품성(稟性)이 온공(溫恭)하고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덕(德)을 숨겨 자겸(自謙)하고 청고(淸高)한 뜻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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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001.png 건지(建之)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헌공(正獻公)이시다. 공(公)은 임금님이 내리신 이름은 천달(天達)이라 하시고 자(字)는 자춘(子春)이며 문안공(文安公) 산화선생(山花先生)의 현손(玄孫)이시다. 나이 13세(十三歲)에 경사(經史)를 통달(通達)하셨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셨는지라 태조(太組) 4년(四年) 을해(乙亥, 1395)에 제자원(弟子員)에 선발(選拔)되어 상국(上國)에 유학(遊學)하시어 태종(太宗) 6년(六年) 병술(丙戌, 1406)에 갑과(甲科)에 합격(合格)하였으며 곧 장보(張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안남(安南)을 정벌(征伐)하는 전쟁(戰爭)에 참전(參戰)하여 안남(安南)을 평정(平定)하니 황제(皇帝)가 남경별기영도위(南京別騎營都尉)란 벼슬을 제수(除授)하였다.

 

태종(太宗) 9년(九年) 기축(己丑, 1409)에 환국(還國)하시어 3년(三年) 동안에 두 번이나 병조(兵曹)에 임명(任命)되었다. 북경(北境)에 오랑캐가 번성하여 무도하게 횡행(橫行)하니 조정신하(朝廷臣下)들이 공(公)을 추대(推戴)하여 이도(二道:함경도(咸境道), 평안도(平安道)) 경략사(經略使)를 삼으니 은덕(恩德)으로 힘써 정사(政事)를 행(行)하니 북경(北境)이 다 평화(平和)롭게 되었다. 태종(太宗) 15년(十五年) 을미(乙未, 1415)에 천관정경(天官正卿)으로 하정사(賀正使)에 선임(選任)되어 정주(定州)땅으로 행차 중(行次中) 노병(路病)으로 돌아가셨는지라후사(後使)가 이르러 천자(天子)께 그 형상(形狀)을 알리니 천자(天子)께서 심히 슬퍼하셨다. 태상(太常)이 천자(天子)께 아뢰기를 “이모(李某)는 충성(忠誠)스러운 신하(臣下)입니다.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하여 용처(用處)에 합당(合當)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지야(智也)오, 정사(政事)를 덕(德)으로써 하여 먼 오랑캐가 감복(感服)을 하니 인야(仁也)오, 한결같은 마음으로 국가(國家)를 위(爲)하여 어렵고 험난함을 피(避)하지 아니하니 공야(恭也)오, 청렴하고 예(禮)가 있어 벼슬에 거(居)하기를 청백(淸白)하니 검야(儉也)라. 정헌(正獻)이란 시호(諡號)를 내리심이 마땅하옵니다.” 하니 천자(天子)께서 가당(可當)하다고 결재하여 내리시니 이 모든 것이 그 분의 입신본말(立身本末)의 사실(事實)의 기록(記錄)이다.

 

p001.png 심지(審之)

조선(朝鮮) 태종(太宗) 8년(八年) 무자(戊子, 1408)에 함안군수(咸安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선정(善政)으로써 명망(名望)이 널리 알려졌으나 경인년(庚寅年, 1410)에 모친상(母親喪)을 당(當)하여 거환(去宦)하였고 그 후(後)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역임(歷任)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선산(善山) 금오산하(金烏山下) 형곡리(荊谷里)에 이거(移居)하였다.

 

p001.png 수지(粹之)

벼슬이 승훈랑(承訓郞) 운봉감무(雲峰監務)에 이르렀다. 성주(星州)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에 이거(移居)하였다.

 

p001.png  신지(愼之)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叅判)에 이르렀으며 아들 명겸(鳴謙)의 귀(貴)로 인(因)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홈실(명곡(椧谷))로부터 창녕현(昌寧縣) 합산리(合山里)에 이거(移居)하였다.

 

p001.png 사지(思之)

호(號)는 여은정(麗隱亭)이고 벼슬은 중랑장(中郞將)이며 두문동(杜門同) 72현(七十二賢)의 한 분이다.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더불어 친분(親分)이 있어 시문(詩文)을 곧잘 주고받으면서 서로 뜻을 보였다. 밀양(密陽) 용안서원(龍安書院)에 배향(配享)하고 있다.

 

p001.png 희조(希祖)

자(字)는 국임(國任)이다. 부친(父親)의 비명(非命)을 통분(痛憤)하여 신분(身分)을 바꾸고 이름을 달리해서 고양(高陽)에 은거(隱居)하였다. 신원(伸寃)된 후(後)에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p001.png 존인(存仁)

호(號)는 두은(杜隱)이다. 널리 배우고 도탑게 뜻을 두어 문장(文章)이 훌륭하고 기상(氣像)이 뛰어나서 고과(高科)에 발탁(拔擢)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歷任)하였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승자(陞資)하여 충성(忠誠)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報答)하면서 힘든 일에 종사(從事)하기를 성력(誠力)을 바쳤으나 세상(世上)이 망극(罔極)함을 만나서 벼슬에 안주(安住)하지 아니하고 단산(丹山)의 임천(林泉)으로물러나 은거(隱居)하면서 평소(平素)의 뜻을 지켰다.

 

p001.png 존례(存禮)

벼슬이 중랑장(中郞將). 스스로 시운(時運)이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고 물러나 가야(伽倻)의 증산(甑山)에 우거(寓居)하면서 시주(詩酒)와 금서(琴書)로 즐기면서 만년(晩年)을 보냈다. 뒤에 지례(知禮) 니전(泥田)으로 이거(移去)하였다.

 

p001.png 약동(約東)

자(字)는 춘보(春甫), 호(號)는 노촌(老村) 태종(太宗) 16년(十六年) 병신(丙申, 1416) 6월 초2일(방주(傍註)에 10월은 오기(誤記)이므로 바로잡음)에 나셨다. 강호 김선생 문하(江湖金先生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수업(受業)하시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매계(梅溪) 조위선생(曺偉先生)과 일향(一鄕)에서 같이 나시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고 교유(交遊)하셨다. 필재(畢齋)로 더불어 명공거경(名公巨卿)이 일찍이 선생(先生)을 사모(思慕)하여 시(詩)로써 찬미(讚美)하기를 공(公)께서는 시서(詩書)에 통달(通達)하여 진실(眞實)로 사문(斯文)에영수(領袖)요 한 조각 청빙(淸氷)을 옥(玉)병에 담은 것 같고 수월(水月)같은 마음에 송죽(松竹)같은 절의(節義)와 간관(諫官)에 비로소 현재(賢才)를 얻었음이라 나라에 큰 정책(政策)을 세워서 올리고 임금님을 가까이 뫼시면서 충성(忠誠)을 다하였네 천부(天賦)의 자질(資質)로 문무(文武)를 겸(兼)하여 웅장(雄壯)한 뜻 펴셨고 문무(文武)와 재능(才能)에 덕(德) 또한 갖추셨네. 시서예문군자(詩書禮文君子)시나 군율(軍律) 또한 엄숙(嚴肅)하여 어백사(於百事) 반열 중(班列中)에 삼달존(三達尊:덕고(德高), 치고(齒高), 위고(位高))을 지니셨네. 묘당(廟堂:조정(朝廷))에서 군덕(君德)을 보익(輔益)한 인물(人物)을 뽑는다면 공론(公論)이 응당(應當) 공(公)에게 집중(集中)될 것이로다.

 

나시어 학문(學問)에 오로지 뜻을 두고 경전(經典)과 서전(書傳)에 박학(博學)하여 덕망(德望)과 행의(行誼)가 유림(儒林)의 영수(領袖)로다.

세종(世宗) 신유(辛酉, 1441)에 진사(進士)를 하시고 문종(文宗) 신미(辛未, 1451)에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문무(文武)로 내외(内外) 청요직(淸要職)을 역임(歷任)하셨다. 오묘(五廟:다섯 임금)를 섬기시면서 도백(道伯)과 여덟 고을 수령(守令)을 지나면서 빙옥(氷玉)같은 청렴결백(淸廉潔白)으로 치적(治績)이 높아 백성(百姓)에게 은혜(恩慧)를 베푸셨다.

 

성종조(成宗朝)에 공신(功臣)으로 좌리원종훈(佐理原從勳)에 책록(策錄)되고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임기(任期)가 차서 돌아오실 때에 괘편(掛鞭)과 투갑(投甲) 등의 이적(異績)이 있다. 《국조여지승람(國朝輿地勝覽)에 목사(牧使)로 있다가 임기만료(任期滿了)로 돌아오실 때에 말채찍 하나를 손에 가졌을 뿐인데 이것도 섬 물건(物件)이다 하고 누각(樓閣)에 걸어놓고 오시었다. 세월(歲月)이 오래되어 채찍이 상(傷)하여 땅에 떨어지니 고을 사람들이 이 광경(光景)을 그림으로 그려서 선생(先生)을 사모(思慕)하였다.》하고 또 돌아오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자 갑자기 빙빙 돌면서 기우뚱거리는지라 위태로운 가운데 선생(先生)은 조금도 동요(動搖)됨이 없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나는 조금도 사리(私利)를 탐하여 죄(罪)지은 일이 없는데 막료(幕僚) 중에 누군가 부정(不正)을 하여서 신명(神明)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치게 한 것이 아닌가!” 하심에 과연(果然) 휘하(揮下) 사람이 장차 선생(先生)을 위(爲)하여 갑옷 한 벌을 숨겨가지고 오는 일이 있었다고 사실(事實)대로 고(告)함에 선생(先生)께서 명(命)하시어 바다에 던지게 하니 파도(波濤)가 잠잠하고 배가 순항(順航)을 하기에 이르러 모두들 선생(先生)의 청빙(淸氷)같은 염조(廉操)에 신(神)도 오욕(汚辱)되게 함을 싫어하여 이와 같은 작란(作亂)을 한 것이다 하였고,〈관광객(觀光客)을 위(爲)하여 투갑연(投甲淵) 현지(現地)에 사실기(事實記)가 있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셨으며 대사간(大司諫), 경주(慶州) 및 한성부윤(漢城府尹), 개성유수(開城留守), 전라감사(全羅監司), 이조(吏曹)ㆍ호조참판(戶曹叅判),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나시고 기로사(耆老社)에 드시었으나 연로(年老)하여 관직(官職)을 사임(辭任)하시고 고향(故鄕) 하로촌(賀老村)에서 우유소일(優遊消日) 하셨으니 선생(先生)께서는 청덕(淸德)과 아망(雅望), 염조(廉操)와 염절(恬節)로서 사림(士林)의 영수(領袖)가 되셨다.

 

성종(成宗) 24년(二十四年) 계축(癸丑, 1493) 6월 13일에 하세(下世)하시니 78세(七十八歲)를 향수(享壽)하셨다. 성종대왕(成宗大王)께서 심히 슬퍼하시어 예조정랑(禮曹正郞)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여 고유(告諭)하기를 천자(天資)가 단아(端雅)하고 매사(每事)에 근신(謹愼)하며 성품(性品)이 순결(純潔)하고 정직(正直)하여 외지(外地)에 나아가 고을을 다스림에 치적(治績)이 제일(第一)이요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풍속(風俗)을 교화(敎化)하고 인애(仁愛)로 백성(百姓)을 구휼(救恤)함이 그 마음 감이(甘梨:단 배)와 연꽃 같아라.지난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재임 시(在任時)에 진실로 격려(激勵)와 보익(輔益)을 받았는지라 이를 가상(嘉尙)히 여겨 곧 벼슬 품계를 높이려 하였는데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망극(罔極)한 지경(地境)에 이르게 하였으니 경(卿)의 부음(訃音)을 듣고 탄식(歎息)스럽고 애석(哀惜)한 마음 금(禁)할 길 없어 평정(平靖)으로 시호(諡號)를 내리노라.

 

시법(諡法)에 “정사(政事)를 집행(執行)함에 절제(節制)있음을 평(平)이라 하고 유화(柔和)한 덕행(德行)으로 여러 사람을 편안(便安)케 함을 정(靖)이라 한다.” 하였다.

한라산(漢拏山) 백록담(白鹿潭)에서 천지신명(天地神明)께 제사(祭祀)지내던 풍속(風俗)으로 백성(百姓)의 고통(苦痛)이 많았던 바 이를 산하(山下) 평지(平地)에서 산신제(山神祭)를 올리기로 변경(變更)하고 전래(傳來)의 악습(惡習)은 폐지(廢止)하고 선량(善良)한 풍속(風俗)은 천양(闡揚)하여 여러 시책(施策)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취용(取用)하므로 도민(島民)이 크게 기뻐하여 선정(善政)을 송덕(頌德)하고 영원히 존모(尊慕)하기 위하여 생사당(生祠堂)을 건립(建立)하였다. 이름하여 부르기를 영혜사(永惠祠)라 하고 제주(濟州)에 있다.

 

금산(金山) 경렴서원(景廉書院)과 제주(濟州) 귤림사(橘林祠)에서 향사(享祀)를 하여 오다가 방령(邦令)으로 훼철(毁撤)된 후 유림(儒林)의 공론(公論)으로 선생(先生)이 계시던 곳에 하로서원(賀老書院)으로 편액(編額)하여 복원(復院)하고 또한 금세(今世)에 제주도(濟州道)에서 유적(遺蹟)을 기리기 위(爲)하여 기적비(紀績碑)를 곰솔공원 경내(境内)에 수립(竪立)하였다.

 

선생(先生)이 자손(子孫)에게 유계(遺戒)한 시(詩)에 “가난하고 어려워도 분수(分數)대로 살지어다. 쪽박과 낡은 옹기 나의 전 재산(財産)이라. 주옥(珠玉)이 만당(滿堂)해도 씀에 따라 없어지니 청렴결백(淸廉潔白) 가훈(家訓)으로 아손(兒孫)에게 전(傳)하리라.” 하였다.

 

p001.png 존신(存信)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이며 호(號)는 한계(寒溪)이다. 품성(稟性)이 온공(溫恭)하고 효우돈목(孝友敦睦)하며 덕(德)을 숨겨 자겸(自謙)하고 청고(淸高)한 뜻을 지켰다.